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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적 숫자들



'천문학적 숫자'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뉴스, 잡지 등에서 엄청나게 큰 양이나 갯수를 얘기할 때 이런 표현을 쓰는데요, 솔직히 대중없이 사용되는 표현이죠. 이를테면 '얼마 이상 부터 천문학적이라고 표현한다'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천문학적 숫자'라는 어구가 들어간 뉴스를 검색해봤는데, 칼럼이 하나 걸렸습니다. 내용은 차치하고, 문장만 따와 보겠습니다.


"지난 10여년 간 4조3,0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간 테러와의 전쟁"


4조 3천억 달러면 어마어마합니다 (역시 천조국...). 천문학적 숫자라고 할만 합니다. 도대체 4조 3천억 달러는 얼마나 많은 돈일지 전혀 감도 안옵니다. 이런 경우에 천문학적 숫자라고 표현하면 딱 좋을 듯 합니다.


천문학적 숫자라고 한다면 천문학에 나오는 스케일이니까 천문학적 숫자라고 할 것입니다. 최근에 명왕성에 뉴호라이즌스 호가 지나갔죠? 명왕성에 우주선을 보낸 것이 처음이라고 하던데, 명왕성이 지구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요? 사실 지구하고 명왕성이 계속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둘 사이 거리는 계속 바뀌고 있을 거니까, 태양과 명왕성의 거리를 찾아보겠습니다. 지구는 태양에 훨씬 가까우니까 지구-명왕성 거리랑 비슷하겠죠 뭐.




태양과 명왕성의 거리 (평균): 5,924,160,000,000 미터 (ref)


어... 5조 9241억 6천만 미터 입니다. 지구랑 대충 6조 미터 떨어져 있는 모양입니다. 6조 미터는 60억 km 입니다. 지구인이 모두 힘을 합친다면 (지구와 명왕성 사이에 직선으로 길이 나있다는 전제 하에) 각자 1키로씩 이어달리기를 할 수 있군요. 서울-부산을 400 km 라고 치면 서울-부산을 750만번 왕복하면 되는 거리. 서울에서 뉴욕까지가 대충 11000 km 라고 합니다. 약 27만번 왕복하면 되는 거리입니다. 도대체 지구상의 스케일로서는 감이 잡히지 않는 거리입니다.



천문학적 숫자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인가 봅니다. 겁나 크긴 한데, 도대체 얼만큼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 거리. 그냥 '우와 많다'라고만 인식이 되지 정확히 얼만큼인지 이해할 수 없는 숫자.


방금전 미국 국방비 얘기로 돌아가서, 4조 3천억 달러가 얼마나 많은 돈인지 어떻게든 따져보겠습니다.


요새 햄버거가 많이 비싸져서, 맥도날드나 버거킹 가면 대충 7천원쯤 줘야 셋트 사먹습니다. 대충 7달러로 잡으면, 빅맥 셋트 6143억개 입니다. 제가 죽을 때 까지 빅맥만 먹는다고 하면, 하루 3끼 X 365일 X 60년 = 65700개. 저혼자 먹어서는 택도 없으니 지구인이 힘을 합친다면, 각자 102개씩 먹으면 됩니다. 세달간 전 지구인이 저녁마다 햄버거 파티를 벌일 수 있는 돈이군요.


이건 좀 유치하니까, 나름 그럴싸하게 우리나라 1년 국정예산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4년 우리나라 정부 예산안 총 금액은 370조 7천억원 이었다고 합니다 (ref). 근 한달사이 달러 환율이 엄청 올랐는데, 그냥 1100원으로 잡겠습니다. 3370억 달러. 4조 3천억 달러면 우리나라 예산을 약 13년간 충당할 수 있네요. 10여년간 테러와의 전쟁으로 4조 3천억 달러를 썼다는데, 거의 매년 우리나라 총 예산 만큼 전쟁비로 썼네요.


우리나라에서 (압도적으로) 제일 큰 단일 기업 삼성전자의 시가총액과 비교해볼까요? 오늘자 삼성전자 시총이 178,968,600,000,000 원입니다 (ref). 대략 178조원. 이건 오늘자니까 오늘 달러환율 1170원을 적용해준다면, 153,000,000,000 달러. 1530억 달러입니다. 4조 3천억 달러가 있으면, 삼성전자를 28개 살 수 있습니다...


사실 삼성전자 28개라고 해도 그게 얼만큼인지 감이 안옵니다. 그러므로 역시 범지구적 스케일을 동원한다면, 60억 지구인한테 각각 720달러씩 줄 수 있는 금액입니다. 와우, 거의 80만원씩인데, 이러니까 진짜 많은 돈이네요.




이번엔 플라스틱 병 (페트병) 얘기를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애초에 이 글 주제가 생각난 것도 플라스틱에 대해서 찾아보다가 였었는데.. 사람들이 사용하는 플라스틱 병이 몇개나 될까요?


구글에게 물어보았더니, 1년동안 미국인들이 사용하는 페트병이 무려 500억 개라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하도 많아서 감이 안오는데, 미국 인구가 3억명 쯤 되기 때문에 나누어보면 한명당 170개쯤 썼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즉, 이틀에 한개 꼴로 사용했다는 것이죠.


반대로 생각해보면 미국 사람들 각자는 페트병을 이틀에 한개 밖에 사용하지 않았을 뿐인데, 이것을 몽땅 합쳐가지고 일동안 합산을 해버리니까 500억 개라는 무지막지한 양이 된다는 것입니다.




먹고싶다


무엇이든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간간히 끓여먹는 라면의 경우도 2014년 기준 한국에서 총 36억개가 팔려서, 매출로 따지면 2조원에 달했다고 합니다 (ref). 재미있는 사실은, 인도네시아의 경우도 라면을 많이 사먹는 모양인데, 1인당 소비량은 우리나라보다 적지만, 인도네시아의 인구가 2억 5천명에 달하기 때문에 총 소비량은 149억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양으로 밀어붙이는 산업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전통적 제조업 말이지요. 페트병을 만드는 공장에서 페트병 하나를 만들어 팔면 얼마나 남길까요? 저도 잘 모릅니다만, 인터넷에서 파는 페트병 가격이 대충 200~300원쯤 하기 때문에, 중간 유통 마진을 뺀다면 아마도 공장에서 남기는 금액은 10원? 또는 그 이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워낙 시장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페트병이 500억개 팔렸다고 하면 거기서 남는 순이익만 5000억원에 달하게 되는 것이죠. 매출로 한다면 수십조원이 되는 것이고요.




화공산업이 참 이런게 심한 분야입니다. 박리다매라고 하는, 개당 이윤은 엄청 적지만 판매량이 엄청나서 거기서 이익을 얻는 산업. 예를 들어 석유 정제 산업 (우리나라에선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등, 해외에선 엑손모빌, 셸, BT 등등등) 에서 통상적으로 거론하는 마진 자체가 리터당 몇원 단위 입니다. 즉, 10원도 남기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써대는 기름의 양이 워낙 많기 때문에 이윤구조가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KY O.N.O 형의 패션 브랜드 포스팅에서 보았던 것과는 상당히 상반되는 산업이죠. 타겟팅을 잘 해서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사용하는 일상적 물건을 만들어서 티끌모아 태산을 만드는 (마른수건 쥐어짜는) 참 진입장벽이 높은 산업입니다.


아마도 이런 분야에서 산업을 한다고 한다면, 큰 숫자를 잘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시장 규모가 어떻고 중국의 내수시장이 어떻고 인도 시장이 어떻고 논하는 이유도 결국 이것일텐데, 100원짜리를 팔아도 20억 명한테 팔면 떼부자가 되니까 말이죠. 아까 위에서 범지구적 스케일로 환산한것을 본다면, 머릿수가 많으면 큰 숫자도 별것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큰 숫자를 잘 이해하는 방법은, 크지만 익숙한 단위로 바꿔서 생각해보거나 (가장 효과적인 것 같아요) 시간으로 나누어 본다거나 하는 방법이 있다고 봅니다. 즉, 눈에 보이는 숫자를 줄이는 것이죠.


명왕성 얘기로 돌아가 본다면, 대체 서울-뉴욕을 몇번 왕복하느니 해도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디다 적을 때도 매번 숫자를 열개씩 적으면서 몇 억 몇 조 이러기도 피곤합니다. 그래서 천문학자들이 개발한 아주 좋은 단위가 있습니다.


1 AU (Astronomical Unit) =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 (149,597,871 km)



위 그림에는 명왕성이 표시되있지 않지만 (행성 대우 안해줌 ㅜ) 태양과 명왕성의 거리는 약 39 AU 입니다. 그것은 즉 지구-태양 거리의 약 39배. 이러면 정말 깔끔하게 거리가 어느정도 되는구나 하고 감을 잡을 수 있겠죠.


위 그림에 보시면 축이 로그 축척으로 되어 있어서 그런데, 아무튼 오른쪽에 보시면 α-Centauri (알파센타우리) 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태양계에서 제일 가까이 있는 항성계로, 지구에서 276,000 AU 쯤 떨어져 있습니다 (km로는 굳이 쓰지 않겠습니다...). 역시 AU라는 단위는 태양계 안에서나 쓸만 하지, 인터스텔라 급 스케일로 가면 역시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사용되는 또다른 단위가 바로 광년입니다.


1광년은 빛이 1년동안 날아가는 거리인데, 지구 스케일에서는 빛은 그냥 순간이동 급으로 빠른 것인데, 그것이 1년동안 날아가야 하는 거리니까 정말 겁나 먼 거리이죠. 아무튼 알파센타우리는 지구에서 4.37광년 떨어져 있습니다. 알파센타우리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지구에서는 4.37년이 지나야 관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광년 말고 좀 더 큰 단위로 파섹(parsec)이라는 단위도 있는데 그건 설명하기 복잡해서 넘어가겠습니다. 아무튼 천문학에서는 옛날부터 워낙 큰 수를 다루다 보니까 이렇게 숫자를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아주 큰 단위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래야 적기도 편하고, 받아들이고 이해하기도 훨씬 쉬우니까요.



이제 사회가 발전해가지고 굳이 천문학이 아니라도 천문학적 숫자를 흔히 접하게 됩니다 (주로 돈). 나라에서 무슨 사업을 하는데 돈이 몇십조가 들었다더라, 어디서 국제운동경기를 주최하는데 경제효과가 몇천억이라더라. 이런 숫자들은 너무 커가지고 듣는 사람은 이게 얼마인지 감도 안오고 (나라에서 하는 스케일은 원래 이런건가?) 더이상 생각하기 귀찮아서 흘려보내거나 현혹되거나 하기 딱 좋습니다. 회사의 경우도 매출액이 몇백억이고 수출을 얼마를 달성했으니 투자를 해라 뭐 이런식으로..


그래서 돈의 경우에도 뭔가 큰 단위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냥 억, 조 같은 숫자를 표시하는 단위가 아니라, 실질적인 느낌을 줄 수 있으면서 가치가 쉽게 바뀌지 않는 그런...건 없겠지만, 암튼. 예를 들면 22조원은 1 사대강 이라고 한다던지... 전에 이런 비유를 본 적이 있는데 재미있기도 했지만 실제로 유용한 발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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