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과 정치적 올바름, 그리고 성차별주의
1.남녀의 뇌는 다르다? 다르지 않다? 과학자들이 싸우는 이유?
작년 12월, 인간의 뇌는 남성 혹은 여성 이분법으로 구분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논문(“Sex beyond the genitalia: The human brain mosaic”)이 저명한 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되었다. '마침내' 남녀의 뇌가 크게 다르지 않음이 밝혀졌다는 식의 기사들이 국내외로 쏟아져 나왔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 결과 및 대중 도서들이 남녀의 뇌가 '다르다'는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럴 만했다. 네티즌들은 댓글로 역시 차이가 없을 줄 알았다느니, 차이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둥 갑론을박하기 시작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남녀의 차이가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고 딱 잘라서 이분법으로 구분되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는 논문이었지만, 어찌 됐든 간에 성별에 대한 이슈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고 여기까지는 자연스럽고도 흔한 풍경이었다.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당 논문을 두고 과학자들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뜨겁게 싸우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그들은 대체 무엇을 두고 그렇게 오랫동안 싸우고 있는 것일까?
논문 저자인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교수 다프나 조엘(Daphna Joel)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명확했다. 남녀의 뇌가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뇌는 이분법적으로 남성 혹은 여성의 뇌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일종의 '모자이크 패턴'처럼 여성적인 부분과 남성적인 부분이 섞여 있는 것이다.
[조엘의 주장에 따르면, 남녀의 뇌는 남성적인 부분과 여성적인 부분이 모자이크 패턴처럼 섞여 있다.]
조엘의 연구팀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1,400개 이상의 뇌 촬영 자료를 분석했다. 하나의 뇌를 116개 부위로 나누고 평균적으로 남녀 간 차이가 가장 큰 상위 10개 부위를 골라낸 뒤, 성별 분포에 따라 '남성형', '여성형', '중간형' 세 가지로 분류했다. 한 개인의 뇌에 포함된 10개 부위가 모두 자신의 성별에 해당할 때 '내적 일관성' 이 있다고 간주하고, 이러한 일관성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지를 조사했다. 예를 들면 10개 뇌 부위가 모두 '여성형'으로 나타난 여성은 '내적 일관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만약 인간의 뇌가 여성 혹은 남성 딱 두 가지 분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면, '내적 일관성'을 갖춘 뇌가 높은 비율로 관찰되어야 한다는 것이 조엘의 가설이었다. 결과는 6% 내외에 불과했다. 따라서 우리의 뇌는 남성 혹은 여성 두 분류로만 딱 떨어져 나누어질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조엘은 해석했다. 우리의 뇌가 그렇다면, 다른 행동들은 어떨까? 5,500명 이상의 개인적인 특성, 행동 데이터에도 같은 분석을 시행해 유사한 결과를 얻었다. 이를 통해 조엘은 남녀의 뇌와 개인적인 특성은 이분법적으로 분류될 수 없고, '남성형', '여성형', '중간형' 이 모자이크 조각처럼 섞여 있을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는 많은 양의 데이터를 새로운 방법론으로 분석해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해낸 훌륭한 시도라고 평가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점부터였다. 조엘의 연구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주장들이 몇 개월에 걸쳐 학술지에 수차례 실리기 시작했다. 학술지에 편지를 보낸 과학자들은 조엘의 연구가 잘못된 방법론을 취했으며, 오도하는 해석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조엘의 연구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새로운 분석 방법을 적용하거나 새로운 데이터를 분석하는 수고스러움까지 마다치 않았다. 조엘은 그들의 논의를 환영했다. 재미있게도, 그 과정에서 조엘과 그들은 종종 같은 데이터와 분석 방법을 가지고도 각자 다른 관점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연구자는 조엘이 사용한 '내적 일관성'의 개념이 지나치게 극단적이어서 명백히 구분되는 다른 종간의 데이터를 같은 방법으로 분석하더라도 항상 낮은 비율의 일관성이 관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조엘은 이에 대해 일관성의 반대급부로 계산되는 '다양성' 수치를 추가로 살펴보면 차이를 볼 수 있다고 답했다. 즉 같은 분석 결과를 두고도 '내적 일관성' 값에 초점을 맞추어 문제를 제기한 연구자가 있는 반면, 조엘은 다른 값을 함께 고려해보면 문제가 없다고 했다. 보통은 더 많은 요소를 함께 고려하는 후자의 태도가 더욱 바람직하지만 이 연구의 핵심이 다른 무엇보다도 '내적 일관성'이 남녀 모두에게서 매우 낮았다는 것임을 고려해 볼 때, 어느 한쪽의 관점이 반드시 옳거나 틀리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모자이크 패턴일지라도 다른 분석 방법을 사용하면 남녀 뇌가 충분히 구분된다는 분석 결과를 제시한 연구자도 있었다. 조엘은 그런 식으로 분석할 경우 정보가 변형되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답했다. 같은 분석 결과인데도 그 연구자는 남녀의 뇌가 두 분류로 구분될 수 있다, 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조엘은 구분할 방법이 생물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조엘은 이 데이터를 이용해 남녀의 뇌가 구분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했지만, 몇몇 연구자들은 다른 방법으로 분석할 경우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왼쪽이 여성 그룹, 오른쪽이 남성 그룹. 분홍색이 여성적인 부분, 파란색이 남성적인 부분.]
이것은 과학 논문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으나 관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과학적인 논쟁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과학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희미하게 각자의 가치관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조엘은 애초부터 남녀의 뇌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논문을 검색해 본 결과, 그녀는 최소 5년 전부터 그런 주장을 일관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엘의 논문을 공격하는 과학자들은 마치 남녀의 뇌를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할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엘은 굳이 구분되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선택적으로 이용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즉 조엘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주장 - 남녀의 뇌는 평등하다 - 을 하기 위해 연구를 하고 논문을 발표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두고 있었다.
2.과학적 올바름 vs 정치적 올바름?
과학자들은 객관성이 중요한 연구 활동에조차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저명한 인지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존 브룩만의 저서 “위험한 생각들”에서 과학에조차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에 대한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하버드대학의 래리 서머스 총장이 통계적으로 볼 때 남성과 여성은 인식능력과 삶의 성취도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하자, 맹렬한 반대가 일어났다.
이러한 가설은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위험한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서머스 총장은 여러 달 동안 온갖 구설에 시달렸고, 민족적 인종적 차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검열을 당하거나, 폭력의 표적이 되거나 나치에 비유되고 있다. 광범위한 지적 영역에서는 이런 가설들을 아예 처음부터 논의의 대상에서 배제해버렸다. 인종이란 존재하지 않고, 지능도 존재하지 않으며, 정신이란 부모들에 의해서 채워지는 빈 서판일 뿐이라고 본다.
집단 간의 차이에 대한 연구가 편협한 행위를 자극할 것이라는 잠재된 두려움에도 근거는 있다. 위험을 줄이려고 지적 도구들을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사실is'이 '의무ought'를 내포하지는 않는다. 집단에 따른 차이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 말은 통계 분포상으로 보았을 때의 평균값이나 편차를 얘기하는 것이지,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남자나 여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평등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약속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개인으로서 다루는 정책이지 집단을 대표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집단은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보더라도 올바른 주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앞의 가설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을 아예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것 같다.”
핑커는 사실과 의무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자는 어떤 의무감에 좌우되지 않은 채 객관적인 태도로 사실을 연구해야 한다.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의무에 의해서 연구가 편향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올바른 결론을 담고 있는 논문이라 하더라도 과학적으로 잘못되었다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올바른' 태도다.
핑커의 말에 따르면, 조엘의 논문에 이의를 제기한 과학자들은 이러한 ‘과학적 올바름’을 지키기 위해 조엘의 연구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남녀평등의 가치관에 편향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엘의 연구는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있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오류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녀의 분석 방법을 적용했을 때 남녀의 뇌가 두 분류로 구분된다기보다는 서로가 뒤섞여있는 모자이크 패턴에 가깝다는 과학적 발견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면 남녀의 뇌가 확실히 다르다는 주장을 하는 과학자들은 과연 자신의 신념대로 ‘과학적 올바름’을 준수하고 있는 것일까? 조엘의 논문을 반박했던 과학자들은 대부분 성별 차이에 관한 연구를 주로 수행하던 연구자가 아니기에 일단은 혐의가 짙지 않다. 그러나 호주의 심리학자 코델리아 파인에 따르면, 최소한 핑커가 언급한 사례에서만은 과학자들의 ‘과학적 올바름’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기만적이라 할 수 있다.
3.뉴로섹시즘에 주의하라
코델리아 파인은 저서 "젠더, 만들어진 성"을 통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서머스 총장의 발언을 옹호하기 위해 핑커를 비롯한 일련의 과학자들이 인용했던 많은 연구 결과들이 실은 ‘과학적으로도 올바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당시에 과학적인 근거로 언급되었던 주요 사례들은 세 가지였다. 남녀의 수학 과학 성적 차이, 태아기 테스토스테론 수준과 ‘남성적’인 능력의 상관성, 신생아 성별에 따른 행동 차이.
파인이 조사한 결과, 남성이 여성보다 ‘가변성’이 높아 수학 과학 능력이 뛰어난 개인의 비율이 높다는 연구 결과는 특정 국가에 한정했을 때만 성립했다. 만약 능력의 차이가 성별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다면 국가를 가리지 않고 특정 성별에 대한 경향성이 나타나야 하는데, 남녀의 수학 능력 차이에 관한 연구는 국가별로 결과가 다르다. 따라서 이는 타고난 성 차이라기보다 사회 문화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으며, 남성이 여성에 비해 뛰어나다고 쉽사리 결론 내리기 어렵다.
태아기 테스토스테론 수준과 ‘남성적’인 인지 능력과의 상관관계 역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관성 있게 관찰된 바 없다. 태아기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을수록 인지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측정 방법이나 실험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를 얻은 연구도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유명한 사례인 신생아 실험(“Sex differences in human neonatal social perception “)에는 기본적인 설계상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한다(참고로 신생아는 태어난 지 반나절밖에 되지 않아 타고난 성 차이를 확인하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다). 남자 신생아가 여아보다 움직이는 모빌을 선호하고, 여아는 모빌보다 여성의 얼굴을 선호함을 보여준 제니퍼 코넬란(Jennifer Connellan)의 연구 결과는 남녀의 타고난 성향 차이를 드러내는 과학적인 증거로 지금까지도 수없이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파인에 따르면 당시 실험자가 신생아의 성별을 알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성별에 편향된 행동을 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신생아의 주의 집중력은 짧고 불안정하므로 여성의 얼굴과 움직이는 모빌을 동시에 보여주고 아이의 반응을 관찰했어야 하는데 실험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한, 실험 환경에 따라 아이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경 조건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았다. 어떤 아이는 누운 상태로, 어떤 아이는 부모에게 안긴 상태로 실험에 참여했다. 이렇게 잘 통제되지 못한 실험은 때에 따라 편향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파인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추후에 시행된 보다 엄격히 통제된 신생아 실험에서는 성별에 따른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언급한다. 몇 달 후에 다시 실험했을 때에야 비로소 성별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성 고정 관념화된 행동 유형들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유아기 초기에 학습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신생아 실험에서 이용된 두 가지 시각 자극. 왼쪽은 논문 1저자 제니퍼 코넬란의 사진. 오른쪽은 그 사진을 뒤섞어 만든 모빌(이라기엔 너무 무섭게 생겼지만 나름 시각 자극 통제를 위한 설계).]
파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남녀의 뇌가 다르다는 주장을 대중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과학자들을 하나둘 저격한다.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 여성 심리와 호르몬 클리닉 소장 루안 브리젠딘이 대표적인 타겟 중 하나다. 브리젠딘은 저서 "여자의 뇌, 여자의 발견"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 뛰어나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수많은 신경 과학 학술 논문을 근거로 인용하고 있지만, 파인에 의하면 근거가 빈약하고 오도하는 부분이 있다.
여성이 높은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브리젠딘이 인용한 실험 중 몇 가지는 사실 실험 대상자가 모두 여성이었다. 여성이 남성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최소한 비교 대상으로써 남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타인의 마음에 공감하는 거울 뉴런 체계에 관한 연구를 인용하며 여성의 공감 능력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 연구의 피실험자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여성의 뇌가 어른이 되면서 더 높은 공감을 보인다는 말을 하며 인용했던 연구는 사실 여성과 남성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나이에 따른 차이를 본 것뿐이다.
이런 브리젠딘조차 자신을 스스로 '마지못해 용감함을 무릅쓰는 진실의 전달자'인 양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내 머릿속에 있는 두 목소리와 고군분투했다. 하나는 과학적 진실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정확성이다. 비록 과학적 진실이 항상 환영을 받는 건 아니지만, 난 정치적 정확성보다는 과학적 진실을 강조하기로 했다."
파인에 의하면 ‘과학적 올바름’이 ‘정치적 올바름’에 무릎 꿇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핑커와 브리젠딘의 사례에 인용된 연구들의 상당수는 모순적이게도 ‘과학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파인은 이렇듯 학계와 대중 사이에 무비판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남녀의 신경과학적 차이에 대한 관점을 '뉴로섹시즘(Neurosexism)', 즉 뇌성차별주의라며 비난했다.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검증되지도 않았으면서 뇌과학의 권위에 기대어 대중들에게 성차별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남녀 차이에 대한 유명한 뇌과학 연구 중 상당수가 실험 설계 혹은 방법론,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파인은 주장한다.
파인에 따르면 뉴로섹시즘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뇌과학’ 꼬리표가 붙은 설명은 과도한 설득력이 있어 대중적 파급력이 크기 때문에. 둘째는 우리가 성별에 따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성 차이를 강화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파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연구 사례를 들어 두 번째 이유에 대해 부연 설명했다.
심리학자 일란 다르님로드와 스티브 헤인에 따르면 유전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뛰어난 수학 능력을 지닌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여성이, 유전적 요인보다는 경험적 요인이 크다는 에세이를 읽은 여성에 비해 수학 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기록했다. 그들은 “단순히 수학 성적에 나타나는 유전자의 역할을 고려하는 것만으로도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스탠퍼드대 심리학자 캐럴 드웩은 지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발견했다. 드웩에 따르면 능력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노력으로 향상될 수 있다고 학생들을 격려한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성적이 향상되었다.
파인은 이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뉴로섹시즘이 남녀 차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강화함으로써 성 차이가 더 명백해지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기에 이 주제를 다루는 과학자들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4.뉴로섹시즘이 어쨌다구?
뉴로섹시즘에 대한 파인의 매서운 공세를 보고 있자면 모든 성별 차이에 관한 뇌과학 연구가 사기인 것만 같은 착각까지 든다. 그러나 파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성 차이에 관한 연구 결과를 찾아 부정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녀는 일단 남녀의 뇌 크기가 다르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크기의 차이가 기능의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것은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그녀의 저서에 언급된 남녀의 차이는 크기뿐만이 아니다.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사회뇌과학 연구단장 타니아 싱어의 연구 결과는 남녀의 공감 능력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싱어의 연구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폭넓은 공감 능력을 발휘했고, 활성화된 뇌 부위의 차이도 보였다. 그러나 파인은 이 차이를 평가절하하고 서둘러 본래 주제로 넘어가 버렸다.
물론 파인이 시종일관 주장했듯이, 남녀 차이가 명백해 보이는 현상조차 후천적 환경 요인을 배제할 수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갓 태어난 신생아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제외하고는 성별 차이를 확인하려는 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차이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사회 문화적인 영향력에 의한 것 아니냐는 마법의 질문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기발한 실험 설계를 통해 남녀의 선천적인 뇌 차이를 발견하게 되더라도 파인의 논리에 따르면 그것은 구조적인 차이에 불과할 뿐 기능적인 차이로 연결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파인은 프레리 들쥐의 경우 암컷과 수컷이 다른 뇌를 가지고 있음에도 비슷한 자녀 양육 패턴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를 두고 샐리아 무어의 발언을 이용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신경학적 차이를 상쇄하는 다른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신경학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신경학적 차이점은 동일한 행동이라는 종결점으로 가는 다른 경로이다.” 그럴싸한 해석이긴 하지만 이런 논리라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차이가 있으면 환경 탓이거나, 혹은 같은 기능을 위해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외의 해석은 뉴로섹시즘이다. 끝.
만약 뇌 부위의 차이도 발견하고 동시에 기능의 차이도 발견했다 치자. 파인은 정확히 그러한 연구 사례를 인용했다. “공간 상관성 과제에 관여하는 뇌의 우측 운동 전 영역을 스캔한 영상은 남성보다 여성의 성적이 낮은 것이 다른 유형의 뇌 반응을 일으킨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공간 추론 능력의 성 차이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파인에 따르면 이는 순환 해석의 오류에 불과하다. 왜 남성이 여성보다 공간 추론 성적이 좋은지를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성별에 따른 특정 뇌 부위의 활성화와 행동의 차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파인에 따르면 이 역시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문화적인 차이일 뿐, 선천적인 성 차이는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이런 식의 뇌과학 실험에서 가장 근본적인 실험 설계상 문제점은 다른 무엇보다도 ‘성별 차이’를 조사하겠다는 주제 그 자체인 듯하다.
파인은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이중적인 잣대를 적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파인은 동물 실험에서 태아기 테스토스테론 수준이 뇌의 성별을 바꾼다는 연구 결과가 있음에도 이를 함부로 인간에게 적용하기는 어렵다며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자신의 논리에 들어맞는 동물 실험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앞서 말한 프레리 들쥐 실험이라든지, 환경 요인에 따라 성 특이적인 뇌 부위가 달라지는 동물 실험과 같은 연구들은 큰 비판 없이 유전적 요소보다 환경 요인이 큰 근거로 인용하고 있다.
2013 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대규모 연구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보다 좌뇌와 우뇌의 연결이 더 강했다. 파인은 해당 연구자들이 뇌의 구조적 차이를 기능적 차이로까지 과도하게 해석한 점을 지적했다. 비록 과잉 해석을 경계하는 것은 옳은 태도지만, 그렇다고 뇌의 구조적 차이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파인은 여성과 남성의 뇌 연결 패턴이 다른 이유를 남성의 뇌가 크기 때문에, 혹은 환경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아마 남녀의 뇌가 다른 연결 패턴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평균적으로 남성의 뇌(위)에 비해 여성의 뇌(아래)의 경우 좌뇌와 우뇌의 연결이 강하다.]
최근까지도 남녀 차이에 관한 뇌과학 연구 결과들은 자폐증과 같은 정신 질환에서부터 하품과 같은 사소한 행동에 이르기까지 주제를 가리지 않고 발표되고 있지만, 대부분은 신생아보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이기에 유감스럽게도 파인의 공격을 피해갈 수는 없다. 다만 사회 문화 환경적인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실험 조건에 따라 ‘성인 남녀의 뇌 혹은 행동 차이는 존재한다’는 과학적 발견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5.그래서 결론은?
그래서 누가 맞는 걸까?
남녀의 뇌는 명백히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조엘일까, 충분히 구분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다른 과학자들일까?
남녀의 차이는 명백히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일까, 그런 연구에 대한 해석들이 모두 뉴로섹시즘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파인일까?
재미없는 이야기겠지만, 누구 한 사람만이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는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남녀 간의 뇌 차이는 다소 과장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의 뇌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들 역시 모조리 다 무시할 수는 없다. 방법론과 관점에 따라 남녀의 차이는 과장되기도 축소되기도 한다. 연구 결과 및 해석에 대해 과학적으로 일리 있는 지적을 하는 것은 건전하며 의미가 있다. 경계해야 할 것은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를 과도하게 해석해 대중들에게 왜곡된 가치관을 전달하는 것이다.
6.우리의 태도
파인은 비록 핑커와 같은 과학자들의 태도에 기만적인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으나, “우리가 그 결과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특정한 종류의 연구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즉 과학자들은 ‘과학적 올바름’에 대한 태도에 동의하고 있다. 자칫 파인은 뇌 구조에 있어 남녀 차이를 찾아서는 안 된다고 눈을 부릅뜨고 외치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녀는 “남녀 차이에 대한 잠재적인 편견이 연구 디자인과 해석에 영향을 주고 있고, 이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이를 뿐 아니라, 결국 남녀의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하게 되는, 그런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경계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사회 문화적 파장이 크기 때문에 더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인은 이처럼 ‘과학적 올바름’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과학자들에게 그 이상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과학자에게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흥미로운 방향으로 해석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렇지만 그런 욕구는 종종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한 연구 결과에 자극적인 옷을 입혀 세상에 내놓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비록 살짝 치우친 해석에서 출발했을 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점차 과장되고 오도되어 사회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큰 파문을 일으킨다면 과학자는 그것이 곡해해서 받아들인 대중의 책임일 뿐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을까? 어쩌면 과학자들의 책임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가능성을 인지하는 순간 과학자는 더 깊이 고민하고 책임감 있는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올바름’이야말로 과학계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가까운 것이겠지만 그 영역을 훼손하지 않고도 윤리적인 의무를 감당하는 것은 가능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과학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다. 보다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접근하고 과학적으로 해석하되 모든 지나친 확대 해석과 그 사회적 파장에 주의하는 것.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는 수용자로서 우리 역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일부 사례만으로 쉽게 일반화하기 좋아하는 뇌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 지역 출신이 자신에게 안 좋은 행동을 했다면 해당 지역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하기도 하고, 특정 성별을 가진 사람 몇몇이 동일한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성별을 가진 집단 전부를 매도해 버리기도 한다. 이런 일반화는 우리 뇌가 고수하고 있는 일종의 오래된 생존 방식일 수 있다. 우리는 적자생존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빠른 판단을 내려야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마주한 상황에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그 선택이 생존을 좌우하기까지 하는 상황이 즐비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에 있는 상대를 빨리 뻔한 스테레오타입으로 욱여넣어야 했을 것이고, 대부분 그것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유형이었을 것이다. 일단 나에게 위험하거나 좋지 않은 상황을 최대한 회피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을 테니까.
그러나 현대 사회는 더 이상 그 정도로 위험한 정글이 아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개개인들의 개성이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를 생동감 넘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뇌는 인지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더 편한 쪽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여 버리고 만다. 상대방을 스테레오타입으로 쉽게 규정하고 멋대로 재단해 버리는 잘못을 습관적으로 저질러 버린다. 누군가 자신을 스테레오타입의 틀에 끼워 넣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면 그제야 그것이 얼마나 부당하고 잘못된 행동일 수 있는지를 잠시 깨닫는다.
가능한 한 우리는 평균값으로 측정된 집단 간의 비교 결과를 섣불리 개개인에게 적용해버리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경험적인 사례든 과학적인 결과든 마찬가지다. 앞서 핑커가 언급했듯 “집단에 따른 차이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 말은 통계 분포상으로 보았을 때의 평균값이나 편차를 얘기하는 것이지,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남자나 여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치적 평등이 “사람들을 개인으로서 다루는 정책이지 집단을 대표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일련의 뇌과학 연구들과 논쟁, 뉴로섹시즘 논란을 지켜보면서 경험과 과학적 사실에 의존해 특정 성별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으로 개개인을 쉽게 판단해 버리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새삼 상상하고 인식하게 된다.
By June
https://www.facebook.com/xbluescreenlifex/
[References]
< 참고 논문 >
화제의 논문
http://www.pnas.org/content/112/50/15468
논문에 대한 반박 편지들
http://www.pnas.org/content/early/2016/03/15/1525534113
http://www.pnas.org/content/early/2016/03/07/1524418113
http://www.pnas.org/content/early/2016/03/15/1523888113
http://www.pnas.org/content/early/2016/03/15/1523961113
논문 저자의 답장
http://www.pnas.org/content/early/2016/03/15/1600792113.short
http://www.pnas.org/content/early/2016/03/07/1600791113.full
신생아 실험 논문 (관련 사진)
http://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163638300000321
< 참고 도서 >
존 브록만 (2007) "위험한 생각들" 갤리온
코델리아 파인 (2014) "젠더, 만들어진 성" 휴먼사이언스
< 관련 기사 >
http://science.sciencemag.org/content/346/6212/915.full (남녀 모자이크 뇌 그림)
http://www.sciencemag.org/news/2015/11/brains-men-and-women-aren-t-really-different-study-finds
https://www.theguardian.com/science/2015/dec/01/brain-sex-many-ways-to-be-male-and-female
http://medicalxpress.com/news/2015-11-male-female-brain-valid-distinction.html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2/01/0200000000AKR20151201108100009.HTML?input=1195m
http://newspeppermint.com/2015/01/15/m-neurosexism/
http://scienceon.hani.co.kr/138928 (남녀 뇌 연결 다름을 보여준 연구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