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 O.N.O

한국계 야쿠자

bslife 2014. 5. 19. 07:16

야쿠자 조직원들 중 많은 부분이 한국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우선 본 포스팅은 어떻게 일본인구의 0.5% 밖에 차지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그렇게나 많이 야쿠자와 연계되었는지를 대략적으로 알아보고, 현재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야쿠자를 알아본다. BSL은 야쿠자를 동경한다거나 그들의 행동이 응당하다고 전혀 생각하고 있지않음을 우선 밝히고 시작합니다.

(*정확한 한국계 야쿠자들의 %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이지만, 최대 70%가 한국계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일본 경시청에서는 10%가 한국계 70%가 부락민이라고 하기도 한다. 귀화등의 이유등으로 정확한 수치는 불가능해보이지만 야쿠자 조직원의 상당수가 한국계인 것은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본론에 앞서 우선 일본내 부호 Top 10을 알아보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포스팅 시점에서 Forbes에 리스트된 일본 내 부호 Top 10 


포브스 일본내 부호 기준으로 

2014년 드디어 역사상 한국계인 손정의가 유니클로의 타다시 야나이를 뛰어넘는 일본내 최고 부호로 자리메김하게 되었다.


2014년 현재, 소프트 뱅크의 마사요시 (손정의, 재일 2세)이 #1, ABC 마트의 마사히로 미키(강정호, 재일 2세)가 #10, 빠칭코계 대부 마루한의 한창우(한국 태생)가 #12에 랭크

2013년 - 손정의가 #3, 한창우가 #8, 강정호가 #12에 랭크

2012년 - 손정의가 #3,한창우가 #10,강정호가 #14에 랭크


애플의 Iphone을 일본으로 소개한 Softbank의 손정의 인생은 그야말로 드라마이다. 한국의 기업들과 달리 자수성가하여 부호에 오른 그는 후쿠오카 태생의 그는 일본내 차별을 피해 16살의 나이로 홀몸으로 미국 유학을 결심, 그리고 UC 버클리와 LA에서 경제와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후에 교세라에 합병되는 Unison이라는 오클랜드의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1981년 Japan Telecom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Softbank는 1994년 J Phone, 2003년 Vodafone Japan KK를 거쳐 2006년 현재의 이름 Softbank가되며 현재 강호 온라인과 미국의 Top5의 핸드폰 서비스업체 Sprint의 대주주이자 야후및 Alibaba의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거대 회사가 되었다. 약 20조(20빌리언 달러)를 보유한 손정의는 한국의 제일 부호인 이건희의 거의 20배에 가까운 재산 보유액이다. (이재용이 3대 부호여서 삼성으로 따지면 숫자는 달리지겠지만서도)


이렇게 손정의와 같이 자수성가한 한국계 사람들이 있었는가하면, 다른 어두운 방향에서도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들은 정건영 (마치이 히사유키,東声会 도세이카이 초대회장)와 신병규(지로 키요타, 稲川会,일본 3대 야쿠자 이나가와카이 5대회장)등의 야쿠자들이었다.


 稲川会 代目継承盃 (2010년 4월에 있었던 이나가와카이 다이메케이쇼사카즈키, 대목계승배. 회장 신병규)

* 한국 영화 범죄와의 전쟁 그리고 키타노 다케시의 Brother등에서 나왔던 사카즈키 의식으로, 야쿠자들의 사카즈키 의식에는 親子盃 (오야코사카즈키 오야붕-꼬붕), 五分五分(고부고부: 쪽 모두 서로를 형제라 부름) 이나 兄弟盃(교다이사카즈키, 형제간)가 있고,  본 비디오는 이나가와카이의 계승 사카즈키 의식으로 많은 주요 간부들이 비디오에 비춰지고 소개된다. 1분 14초와 마지막 부분에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현재 이나가와카이의 5대 회장인 신병규이다. 영화등에서 츄리닝입은 꼬붕 (こぶん, 子分)들이 뒤에서 야쿠자 간부들의 술을 따르는 것과는 달리 차려입은 여성들이 접대를 하는 것이 색달라 보인다. (야마구찌등의 다른 구미의 연회에서는 게이샤 차림의 여성들도 등장한다.) 최대 조직인 야마구찌구미등 많은 조직들이 이렇게 사카즈키 의식의 비디오를 유튜브에 올리거나, 각 조직의 주제가들을 비디오로 올리는 것이 미국의 Crips, Bloods, 아사아계 갱스터들과 비교했을때 굉장히 의식적인 느낌이 강해 훨씬 이색적이다.




우선 야쿠자는 무슨 의미일까?
야쿠자 (ヤクザ, やくざ)는 우선 고쿠도(極道,극도 - 조폭)라고도 불리는 일본의 조직폭력배를 일컸는 말로 미디어측에서는 야쿠자라는 단어보다는 보료쿠단 (暴力団,폭력단)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고, 일반적으로 조직원들 스스로는 닌쿄단따이 (任侠団体,임협단체)라고 지칭한다. Japan Times의 2011년 기사에 의하면 일본내 10만여명이 활동중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에도시절 (17세기초 19세기중반) 도박꾼(博徒,바쿠토,박도)이 즐겨하던 블랙잭과 유사한 게임인 오이쵸카부(おいちょかぶ)라는 게임(합산해서 9가 나오게 하는 게임, 즉 예를들어 11은 1, 16은 6으로 계산)에서 일반적으로 8과 9가 나오면 17로서 7이 되는데 여기서 한번 더 힛을 해서 3이 나오는 즉 0으로 되는 최악의 패가 8-9-3이된다. 야쿠자는 893의 일본어 훈독음이다. 이 게임에서 쓸모없는 자,막나가는 자라는 의미로 도박집단및 불량배를 뜻하게 되며, 현재 가장 큰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찌가 베이스로 하고 있는 효고현(대표도시 고베)과 오사카 지역이 야쿠자가 가장 액티브한 장소인데 비해 현대 야쿠자의 형성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역은 큐슈지역으로 야마구찌 구미의 많은 오야붕을 배출한 지역이자 야쿠자의 탄생에 있어 가장 영향을 끼쳤던 이소키찌 요시다를 배출한 야쿠자의 탄생지역으로 현재도 가장 많은 야쿠자 그룹이 존재하는 지역으로, 전일본으로는 19세기 후반의 부라쿠민(部落民, 부락민)과 20세기 초반의 전후의 한국인들이 유입되며 큰 성장과정을 만들어왔다. 야쿠자의 대부분 의식들은 일본의 전통 의식에서 따온 것으로 예를들어 위에서 설명했던 사카즈키등의 의식은 신토(神道,신도)결혼식과 에서도 볼 수 있는 의식이다. 또한 조직원이 실수를 할때 손가락을 자르는 행위를 일컸는 유비쯔메 (指詰め)는 실수에 대한 자신의 죄를 반성한다는 의미로서 사무라이 시대의 칼 사용에 있어 손가락이 없으면 불편해지는데 이 의식도 또한 일본의 역사적인 배경으로 야쿠자들이 차용했다. 야쿠자들의 타투 역시 일본의 역사와 함께하는데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에서도 죄인들을 구분짓기위해 문신을 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문신은 가려야하는 "혐오스로운" 것이었고 메이지유신시대는 타투자체가 일본내에서 불법으로 규정되었지만, 야쿠자라는 단어를 태생시킨 도박꾼/불량배들은 당시 범죄를 저지르면서 팔 주위에 검은색 종을 문신으로 하나씩 하고 그들이 도박을 할때 상의 하의를 탈의 후 도박을 하였기에 야쿠자와 문신이 맞닿는 점은 이때부터이다.(흑인 갱스터들이 눈 주위에 살인 할때마다 눈물 문신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차후에는 각구미및 카이에 대한 충성및 형제애를 갖는 의미로 발전해왔다. 많이 알려진 사실로 아직도 조직원들은 문신을 공적인 장소에서 가리고 다닌다. 최근의 일로는 온천등의 탈의를 하는 공간에서 2012년 오사카는 타투를 윤리 강령으로서 전적인 공공의 장소에서는 가려야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야쿠자들의 타투 (이미지 출처 : Google) 



야쿠자 조직들은 현재 1991년 폭력력단대책법법 시행함에 따라 분류한 총 22개의 메이저 조직과 그외 많은 조직들이 활동 중이며 2001년 기준으로는 최소 70명의 이상의 멤버를 가진 조직만을 봤을때는 총 26개의 조직이 있다. (*David E Kaplan와 Alec Dubro가 쓴 Yakuza-Japan's Criminal Underworld). 대표적인 10개의 조직만을 보자면 아래와 같다. (*구미는 口組 구조, 카이는 会 회, 이까는 一家 일가. *이외에 코교 興業,흥업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왼쪽부터 야마구찌구미, 수미요시카이, 이나가와카이, 쿄쿠류카이, 코자쿠라이까

아이즈코테쯔카이, 쿠도카이, 쿄세카이, 고다이까, 타이슈카이

(조직을 상징하는 이 심볼을 다이몽이라고 한다.大紋)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야쿠자 3대 조직인 야마구찌구미(山口組), 수미요시카이(住吉会), 이나가와카이(稲川会)를 알아본다.



야마구찌구미(山口組)

전일본 야쿠자 조직원의 대략 50%를 차지하는 조직으로 가장 큰 조직으로 총 40,000여명이 되며 800여개의 구역에서 12000여명의 실질적인 조직원들이 활동중이다. (*여러 미디어에서 집계 방식에 있어서 숫자 차이가 난다. 숫자는 서일본신문 2009년 6월 7일자를 토대로 한 숫자는 18000여명. 또한 최근의 2012년 일본의 경시청 기준으로는 12000여명으로 집계.) 이름 야마구찌는 초대 회장(쿠미쵸, 組長. 본 포스팅에서는 쿠미쵸, 카이쵸등 통칭 회장이라 표현)인 야마구찌 하루키찌(1915-1925)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효고현 고베에서 1915년 항만 노역부를 중심으로 탄생 배경을 갖고 있다. 큰 세력 확장을 통해 야마구찌구미는 일반적으로 허용이 되지 않는 다른 지역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여 현재 도쿄를 포함한 전국구 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도박, 섹스산업, 불법무기밀거래, 마약,부동산, 건설업등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범죄조직 중 하나가 되었다. 야마구찌구미는 일본 야쿠자의 정형화를 만든 조직으로 보면 틀리지 않다. 예를들어 위에서도 설명한 사카즈키 의식은 야마구찌의 세력 확장과 함께 병합을 위해 태어난 것이고 전후 혼란스러운 일본과 함께 상대적으로 이들의 비즈니스는 많아지게 되었기에 가장 큰 성장을 보여줬던 3대회장 타오까 카즈오(田岡一雄, 1946-1981) 야마구찌구미 시대부터는 세력합병및 다른 조직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시기임과 동시에 이 3대 야마구찌 구미의 활약으로 현재의 악명높은 가장 큰 조직의 야마구찌구미를 만드는데 일조를 하며, 계보및 규칙등이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현재 야마구찌는 6대 츠카사 시노부(司忍, 본명:시노다 켄이치)가 2005년에 회장 자리에 올랐고 그는 오이타 출신으로 고교 졸업 후 대형 수산 회사에 취직 오사카 나고야를 거쳐 3대 야마구찌구미의 시절인 1962년 야마구찌구미계의 스즈키구미의 히로타 구미에 가입하며 활약을 한 후 자신의 이름으로 츠카사 흥업(司興業)을 만든다. (*山口組系鈴木組内弘田組, 야마구찌 하위 하위 분파 조직) 1984년 히로타 구미의 히로타의 은퇴와 함께 고도카이 (弘道会)를 결성하게 되고 차후 2005년 3월에는 고도카이를 다카야마 키요시(髙山清司)에게 물려주며 츠카사 시노부는 히로타 구미회장직에 오르게 되지만 그해 11월 총도법(한국의 불법무기소지및 사용죄)위반으로 징역 6년 실형 판결을 받고 오사카 구치소에서 복역하였고, 2011년 4월 형기를 채우고 출소하였다. 최근의 일로는, 1965년에서 75년사이 야마구찌구미 지호라는 조직원용 신문이 발행되었었는데, 2013년에는 야마구찌구미의 조직원용 잡지인 야마구찌구미 신보가 발행되었고, 이 잡지에서는 츠카사 시노부의 글을 포함한 오랜 츠카사의 오른팔인 현 야마구찌 부두목(若頭,와카시라, 현고도카이 보스)인 다카야마 키요시의 글, 낚시 야유회등의 글이 실려있다고 산께이 신문에서 밝힌바 있다. 간행물을 시작한 이유로는 2011년에서 2012년 조직원이 3300여명이 빠져나간 것과 조직의 경기를 활성화 하기위함이었다고 한다. 도쿄의 이나가와카이(稲川会), 마쯔바카이(松葉会)와는 유대관계를 보이고 있으며 후쿠오카의 쿠도카이(工藤会),도진카이(道仁会)등과는 적대 관계를 보이고 있다.

2011년 야마구찌구미 6대회장 츠카사 시노부 출소장면이 방송사의 뉴스를 통해 밀착 취재되었다.

수미요시카이(住吉会)

메이지 시대 도쿄 시바우라에서 도박꾼 무리들이 만든 범죄조직으로 초창기 이름은 수미요시이까로 시작했지만 1991년 수미요시카이로 개명하였고, 수미요시라는 이름은 초대장장 이토마쯔고로 ( 伊藤松五郎)가 도쿄의 수미요시쵸 출신이어서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마약, 불법무기, 인신매매등의 범죄와 연관되어 발전해왔으며, 현재 미국과 호주등에도 비주가 존재하는 조직으로 현재 아카사카에 본부를 두고 있고 2012년 2월 기준으로 12800여명 (5900여명의 준구성원 포함)이 조직원으로 두고 있다. 현재 6대째를 이어오고 있으며 현 소사이(총재,総裁)는 니시구찌 시게오(西口茂男)로 2002년 집권을 시작했다. 라이벌이자 도쿄 지역 확장을 하고 있던 야마구찌구미와 2007년 1월에 중역이었던 료이치 수기우라가 차에서 총으로 머리와 가슴을 맞고 사망하자 바로 야마구치구미에 대항한 총격을 가해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되었었다. (*야마구치 조직 산하로 들어간 코쿠수이카이와의 로뽕기의 영역권 싸움) 스미요시카이는 야마구찌구미와 조직적 연계가 없는 유일한 혼슈의 조직으로 라이벌 관계는 야마구찌의 현회장인 츠카사 시노부가 집권한 이래로 교제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수미요시카이의 8대회장인 세키 이사오(関功)



이나가와카이 (稲川会)

10000여명의 조직원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나가와카이는 현재 도쿄 로뽕기에 본부를 두고 있지만 원래는 시즈오카 아타미 지역에서 쓰루오카마사지로(鶴岡政次郎という)라는 도박조직에서 일하던 이나가와 가쿠지 (稲川角二)가 1949년 이나가와구미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이나가와이까를 거쳐 1972년 이나가와카이로 조직명이 변경되어왔다. 야쿠자조직으로 일본외 해외 지역에서의 활동을 가장 먼저 시작한 조직으로 조직의 수입원으로는 마약, 협박, 섹스산업으로 하고 있다. 이나가와카이의 오대회장은 한국인 신병규(일본명 키요다지로, 清田次郎)로 초대회장의 아들 이나가와토이의 뒤를 이었던 케이요나나이로이까의 보스였던 (京葉七熊一家) 쯔노다 요시오가 77세의 나이로 췌장암으로 2010년 사망하자 신병규가 5대회장에 오른다. 최대 조직인 야마구찌와의 관계는 신병규가 집권하면서 더욱 유해지는데, 야마구찌구미의 부두목인 다카야마 키요시 (高山清司, 위에서 설명한 바 있듯 야마구찌구미 회장 츠카사 시노부가 만든 고도카이의 2대회장이자 한국계로 아이치현 쓰시마에서 1947년 태어남. 신병규는 1940년생으로 알려져있음.)가 계승식에 참석하였고 교다이하이 (형제간의 건배, 兄弟杯)를 하기도하여 미디어에서도 크게 이슈가 되었다. 이 둘은 이전부터 관계가 있었던 사이라고 한다. 또한 야마구찌의 최대 2차 조직인 고도카이가 야마구찌를 점령한 것과 같이 신병규의 야마카와이까(山川一家)가 이나가와 5대를 점령한 것이어서 더 결속력을 다진다는 의미에서 더 큰 의미가 부여되었다.(*산께이신문 2010년 5월 2일자) 2011년 도호쿠 지진때에는 총 100톤이 넘는 라면, 식료품, 음료등을 제공하며 좋은 이미지를 만들려는 노력도 보여준 바 있는 야쿠자 조직이다.


2007년 사망한 이나가와카이 초대회장 이나카와 가쿠지 (稲川角二). 말미부분에 신병규도 보인다.



대략적으로 야쿠자 3대 조직의 숫자가 나머지 여타 메이져 조직들을 합친 숫자가 훨씬 많고, 위 세 조직에서도 최대 조직인 야마구찌구미의 부두목도 한국계 그리고 3대 조직인 이나가와카이의 회장도 한국인인데 왜 이렇게 한국인들이 야쿠자 활동을 하고 있을까?

많은 이유들이 있고, 관련한 많은 글들이 나와있고 종합해 보면 1900년대 초반 일본으로 징병되어 끌려간 한국인이 전후 300만명이 한국에 남게 되었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게 되고 제대로된 직업및 사회로의 진출도 어려웠다. 한국계 불량배들이 재정적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시장은 당시 미군의 구호물자를 거래하던 암시장이었고, 미국의 코리안 갱 에서 언급한 바 있는 정건영 (마이치 히사유키, 긴자 호랑이,1923년생 도쿄 출생)이 암시장등에서 사업 수완을 보이며 재일조선인에게 숙식등을 제공하면서 좀차 늘어나 마치이이까가 형성되며 마치이이까를 주측으로 동성회(도세이카이, 東聲會 후의 東亜会)가 조직되며 이들은 주로 긴자거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간토지역의 오사카에서는 명우회 (묘우카이,明友會)가 고야마고로라는 한국인이 만들어 미나미 거리를 중심으로 세력 확장에 나서지만 동성회는 야마구찌구미의 하부 조직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명우회는 야마구찌와의 전쟁을 하게되며 명우회를 없어지게 하는데 가장 큰 공을 만든 것은 야마구찌의 2차 조직이었던 야나가와구미였는데 (柳川組) 구미쵸(회장)는 한국인 양원석(일본명 야나가와지로, 柳川次郎)이었다. 야마구찌와 한국계가 포인트를 만드는 주요한 정점인데 이 양원석이 이끌었던 현재는 없어진 야나가와구미는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 듯 가장 난폭하기로 유명했고 매번 피를 부르는 과감한 행동으로 "살인군단"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현재의 야마구찌를 만들게한 3대 야마구찌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조직으로 산하 73개의 하부조직과 2800여명의 행동원이 있었던 야마구찌 세부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전국구 조직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양원석은 1930년 부산출생으로 강제노경을 위해 일본으로 끌려온 사람으로 1945년 전쟁 이후 가족은 한국으로 귀국하지만 싸움에 휘말리는 바람에 일본에서 홀로 체류하게 되고 1946년 암시장에서 문제를 일으키며 복역하게 되며 출소 후 오이타현에서 후에 야마구찌구미 이시이구미 두목이 되는 이시이 이치로 (石井一郎)를 만나게 되며 야쿠자 활동을 시작하며 1958년에는 상대방 조직의 100여명을 조직원 8명과 함께 일본도를 들고 소탕해 크게 이름을 올렸고 이 사건으로 수감되어 9개월간 또다시 복역하게 된다. 복역 후 자신의 조직인 야나가와구미를 탄생시키게 된다. 명우회와의 사건은 1960년 일어나게 되며 24명이 체포되었고 1963년에는 공갈등의 혐의로 7년간의 징역이 확정되었고 당시 일본 경시청에서 집중 마크하는 구미로 선정되어 사실상 야나가와구미의 해산이 명령되어 야쿠자 생활에서 은퇴하며 레스토랑을 운영하였고 나중에는 일본 복싱협회의 참여 위원을 지내다 1991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이 야나가와구미는 2대 회장이 되는 역시 한국인 강동화(타다가와 고타로,谷川 康太郎)와 함께 한국인을 대거 흡수하게 되는데, 강동화는 1928년 오사카에서 태어났고 양원석과는 1940년 지하철역에서의 사소한 싸움에서 양원석의 도움을 받아 만나게 된 사이로, 폭력등으로 감옥에 다녀온 후 암시장에 진출해 야나가와와 함께 명성을 떨처나간다. 1964년 양원석을 이어 2대회장으로 올라섰지만 1969년의 자연 조직해산과 함께 사업가로 변신해 활약하다 간암으로 시가현에서1987년 사망하였다. 이 야나가와카이는 야쿠자 시리즈물에서도 인기를 끌었는데 역도산, 최배달과도 의형제였고 현재의 야마구찌 수장이 된 고도카이는 야나가와구미 계열의 산하 조직원들이 뻗어나가 형성된 조직이라고 한다. 직/비간접적으로 현재 야마구찌 부두목 다카야미 키요시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현재 120여명의 야마구찌 수장 중 20명 정도가 야나가와에서 활동하던 교포들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정건영의 동성회를 다룬 야쿠자 시리즈물

야나가와카이를 주제로 한 야쿠자 시리즈물, 실록 야나가와카이



잘 알려진 사실과 같이 일본 야쿠자는 우익적인 성향을 갖고 있고, 한국계 야쿠자들은 한국 정부와의 긴밀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일본 한국계 야쿠자의 시작을 알렸던 긴자 호랑이 정건영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한국정부를 위해 조총련에 대한 압박은 물론 일본의 정치, 경제면에 있어서 중요 정보를 한국에 넘김으로서 신임을 얻어갔고, 김대중 납치 사건, 한일 국교 정상회담등도 역시 정건영과 한국계 야쿠자의 힘으로 이뤄질 수 있었고 댓가로 부산-시모노세키간의 페리, 제주도 관광 개발에 있어서도 큰 여건을 마련해주게됨과 동시에 5억엔이라는 커미션을 챙겨가기도 했다.


1984년 12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 - 야마구찌구미와 수미요시카이의 조직원들이 제주도에 들어와 매춘과 도박을 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 5억엔의 커미션은 도쿄중심의 간토와 오사카, 고베의 간사이의 한국계 야쿠자 사이를 갈라놓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는데, 정건영측의 동성회가 착복하게 됨으로 발단이 되고 양측간의 단교가 되며 각자의 길을 걷게 되며 양원석의 야나가와구미와 함께 동성회도 경시청의 해산압박으로 해산이 되며 야나가와구미와 달리 동성회는 동아우애사업조합(東亜会, 도아카이)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조직이 형성되며 4개로 분리된 이 조직은 야마구찌 산하로 들어가게된다. 



1990년부터 2008년 약 20여년동안의야쿠자 조직의 흐름



현재 한국계 야쿠자 조직원으로 알려져 있는 중요 인물들의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이나가와카이 오대 회장 - 신병규(일본명 키요다지로, 清田次郎

야마구찌 육대 부두목 - 다카야마키요시 (高山清司)

고다이까 오대 회장 (五代目合田一家総長) - 이대강 (일본명 야마나까다이야스시,山中大康)

고다이까 칠대 회장 (七代目合田一家総長) - 김교환 (일본명 마코토 수에히로, 末広誠)

아이즈코테쯔카이 사대 회장 (四代目会津小鉄会会長) - 강외수 (다카야마 도쿠다로, 高山登久太郎)

오소아이카이 오대 회장 (五代目双愛会会長) - 신명우 (타카무라 아키라, 高村明)

사카우메구미 육대 회장 (六代目酒梅組組長) - 신영렬 (오야마 코지, 大山光次)

사카우메구미 칠대 회장 (代目酒梅組組長) - 김재학 (카나야마 코자부로, 金山耕三朗)

사카우메구미 팔대 회장 (代目酒梅組組長) - 남여일 (미나미키 미야비, 南喜雅)

교쿠토카이 오대 회장 (五代目極東会会長) - 조규화 (마쯔야마 신이치, 松山眞一)

마쯔바카이 칠대 회장 (六代目松葉会会長) - 이춘성 (마키노 구니야스,牧野国泰)

소쿠하이카이 삼대 회장 (三代目福博会会長) - 김인순 (나가오카 토라오, 長岡寅夫)

큐슈우세이도카이 초대 회장 (初代九州誠道会会長) - 박식만 (무라카미쇼지로, 村神長二郎)

큐슈우세이도카이 이대 회장 (二代目九州誠道会会長) - 박정호 (나미카와 마사히로, 浪川政浩)


중요인물을 살펴 보자면,


이나가와카이 오대 회장 - 신병규(일본명 키요다지로, 清田次郎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 야쿠자 3대 조직의 하나인 이나가와카이의 오대 회장으로 야쿠자 역사상 한국계로는 가장 큰 퍼지션을 차지한 인물로,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국적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있는 신병규는 2010년 4월 회장으로 오르게 되었고 이나가와카이의 2차 조직인 야마가와의 2대 회장에서 이나가와카이를 계승한 인물로 2011년 지쯔화지호(실화시보,実話時報)에 따르면 건강상의 문제로 부두목인 우찌보리 카즈오 (内堀和也)가 많은 일을 하고 있으며 이 두 사람은 1952년생인 우찌보리의 20세 무렵 신병규를 만나 조직원 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현재 우찌보리가 야마가와의 3대회장이 되어 신병규를 보좌하고있다. 또한 우찌보리는 야마구찌구미의 현재 두목인 츠카사의 조직이었던 야마구찌구미 제일 큰 2차 조직인 고도카이의 부두목인 다케우치(두목은 현 야마구찌 부두목이자 한국계인 다카야마 키요시)와 교다이분(형제관계)여서 더욱 힘이 강하다. 신병규에 대한 신상등에 대한 내용은 공개적으로 알려진 자료가 없어 보인다.

이나가와카이 오대 회장 - 신병규(일본명 키요다지로, 清田次郎


야마구찌 육대 부두목 - 다카야마키요시 (高山清司)

한국계로 알려져있지만 정확한 자료는 나와있지 않아보인다. 1947년생으로 아이치 쓰시마 출신으로 야마구찌의 츠카사가 감옥에 있을때 대행을 했던 현 야마구찌의 부두목으로 2010년 공갈혐의로 체포된 적이있다. 10대때부터 범죄 생활을 시작해 20대때 나고야의 야마구찌구미의 조직인 사사끼구미(현재의 고도카이 산하 조직)에서 조직원 생활을 시작하며 살인혐의로 1973년 감옥에서 4년형을 살고 나왔다. (청년기에 우에다 토베라는 한국계 일본인의 살해혐의로 형을 살기도 했다.)  2010년 건설관련 협박등의 혐의로 체포 되었지만 2012년 150억의 돈을 내고 석방되었다. 야쿠자 조직원 초기 시절 닛뽄도를 들고 싸우다가 한쪽 눈을 다쳐 나고야의 네눈박이 (両目)라는 별명이 있다.


야마구찌 육대 부두목 - 다카야마키요시 (高山清司)



고다이까 오대 회장 (五代目合田一家総長) - 이대강 (일본명 야마나까다이야스시,山中大康)

야마구찌현의 시모노세키의 조직으로 1948년 결성된 조직으로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찌에 반하는 세력 중 하나로 야마구찌현에서 가장 큰 조직의 세력으로 알려져있고 1987년 한국인 이대강이 오대 회장에 오른다. 1977년 10월 22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20일회라 불리는 9개파가 10월 20일 당시 고다이까의 부두목이었던 이대강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 한국으로 단합대회 원정을 와서 고려병원 뒤의 요정에서 단합대회를 하려던 것을 서울시경이 정보를 입수하여 저지하였다는 내용이있다. 


경향신문에서 이대강을 재일교포 야쿠자로 기사화



고다이까 칠대 회장 (七代目合田一家総長) - 김교환 (일본명 마코토 수에히로, 末広誠)

 2010년 자료로는 180여명의 조직원을 갖고 있는 고다이까는 오대회장에 이어 칠대 회장도 한국계인 김교환. 2009년 9월에 칠대 회장에 오른 김교환은 고다이까가 반야마구찌의 이미지를 벗어나게 한 인물로 2010년 나고야의 야마구찌의 고도카이 회장 (즉, 다카야마 키요시 -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야마구찌의 부두목이자 이 고도카이회장인 다카야마 키요시는 주중에는 야마구찌 본부에서 주말에는 나고야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을 직접 찾아가 인사해 두 조직의 공존을 다졌다고 한다.


고다이까 칠대 회장 (七代目合田一家総長) - 김교환 (일본명 마코토 수에히로, 末広誠)



아이즈코테쯔카이 사대 회장 (四代目会津小鉄会会長) - 강외수 (다카야마 도쿠다로, 高山登久太郎)

신병규 이전 가장 큰 조직을 이끌었던 아이즈코테쯔카이의 강외수. 야마구찌구미, 수미요시카이, 이나가와카이의 뒤를 잇는 조직인 아이즈코테쯔카이의 사대 회장이었던 강외수는 1986년 회장에 취임, 1997년 야쿠자의 불문율을 깨고(쿠미쵸 즉, 회장이되면 죽을때까지 집권한다.) 은퇴후 2003년 사망한 인물로 한국계로서 동포들을 위해 많은 지원을해 주어 아이즈코테쯔카이의 활동 영역인 쿄토와 시카켄 지역에서 그를 모르는 동포는 없었다고 한다. 그는 경남 진주출신의 부모아래에서 오사카에서 태어난 강외수는 부모의 높은 교육열로 인해 명문 오사카부립상고를 졸업하였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취직을 할 수 없었고 골재채취 노무자로 사회에 나섰는데, 당시 골재채취권은 야쿠자의 비즈니스였고, 마찰이 많아지고 학창시절 스모선수였던 그가 야쿠자들을 떼려눕히기 시작하며 눈여겨 보던 나카가와구미가 그의 나이 19세에 그를 스카웃하며 야쿠자에 입문하게 되는데 초기 시절 싸움에서 사람을 죽게해 미성년자였기에 6년형을 받고 홋까이도에서 형생활을 했다. 한국 전쟁때는 민단의 600여명을 모아 지원병을 소집기도 하는가하면, 경주의 나라셋마을의 매년 2천만원의 지원, 1988년의 거액 성금, 한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외수장학재단을 설립하는 등 한국을 위해 선행을 배풀어 많은 본을 보여주었다. 민단 중앙본부 위원이기도 했던 그는 한국에서는 그에게 2003년 국민 훈장을 수여했다. 1970년대의 오사카와 쿄토지방의 전쟁을 정리하는 큰 공로를 인정받고 좋은 수완으로 성장하여 1986년 아이즈코테쯔카이의 회장에 오른다. 간암으로 75세의 나이에 사망한 그는 장례식도 조용하게 치뤘다고 하며 그의 아들은 야마구찌구미의 2차조직인 오미이까 (淡海一家)의 초대회장인 다카야마 요시유키(장남, 한국이름 강의행, 高山義友希)이다. 2003년에 코도카이에 가입하면서 오미이까를 만들게 되고 2009년 직계조직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강의행씨는 공갈혐의로 체포 2013년 10년형을 받는다. 몇몇 책에서 소개된 바에 따르면 이 장남 강의행씨가 아버지의 힘을 바탕으로 건설업등을 하다 몇백억엔의 빚을 지게하여 강외수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게 하여 아버지가 스스로 회장직에서 내려오게 만들었고 그후 그는 아이즈코테쯔카이와의 마찰을 피해 야마구찌구미로 가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야마구찌의 전설 야나가와구미의 2대 회장인 강동화와 친구관계여서 야마구찌의 교토로의 진입을 도와 조직의 성장과 함께 좋은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이 강외수에 대한 일대기는 한국 영화 일본 대부(1989년작)가 상영되었었다.


아이즈코테쯔카이 사대 회장 (四代目会津小鉄会会長) - 강외수 (다카야마 도쿠다로, 高山登久太郎)


아이즈코테쯔카이 비디오 - 여러 장면에서 강외수 등장



오소아이카이 오대 회장 (五代目双愛会会長) - 신명우 (타카무라 아키라, 高村明)

치바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직으로 1950년대 조직되었으며 1972년에는 이나가와, 정건영의 도아카이이,수미요시카이와 함께께 관동21일회(関東二十日会, 간토하츠카까이)의 멤버로 현재 230여명의 조직원이 활동하고 있는 조직으로, 1992년 부두목이었던 신명우가 회장에 취임.


오소아이카이 오대 회장 (五代目双愛会会長) - 신명우 (타카무라 아키라, 高村明)



사카우메구미 육대 회장 (六代目酒梅組組長) - 신영렬 (오야마 코지, 大山光次)

사카우메구미 칠대 회장 (代目酒梅組組長) - 김재학 (카나야마 코자부로, 金山耕三朗)

사카우메구미 팔대 회장 (代目酒梅組組長) - 남여일 (미나미 요시마사, 南喜雅)

오사카를 중심으로 200여명의 조직원이 활동중인 도박계 야쿠자 조직으로 한국계가 6대, 7대, 8대 회장을 맡았고 현재에는 9대에 이르렀다. 6대의 신영렬은 수십억엔의 부채를 안고 실종되었고 친동생인 야마구찌찌오먀아구미 회장인 오야마 다케시도 금전적인 문제로 도망다니다 파문(하몽, 破門)당함. 칠대 회장 김재학은 가나야마구미 (金山組)회장으로 칠대회장에 올랐던 김재학은 야마구찌구미의 다쿠미구미(宅見組),마쯔야마구미 (松山組), 오이시구미(大石組)의 회장들과 형제 관계이다. 또한 김재학은 강호동 야쿠자 스캔들의 중점에 있는 인물로 1988년 고등학생이었던 강호동이 오사카에서 열렸던 야쿠자 행사에 참여했다고 채널A에서 2011년 뉴스를 냈는데, 그 행사는 부산 칠성파의 두목 이강환과 사카우메구미의 칠대 회장이었던 김재학의 교다이사카즈키 (兄弟盃)였다고 한다. 사카우메구미 팔대 회장 남여일은 1951년생으로 2010년 회장자리에 올랐다.


김재학회장 시절부터 관계를 더 찐하게 맺었던 야마구찌구미와의 관계가 현재 9대에 까지 이어오는 듯하다. 야마구찌의 요시무라미츠오구미가 사카우메구미의 9대 회장의 생일 축하하기 위해 방문했다는 내용.



교쿠토카이 오대 회장 (五代目極東会会長) - 조규화 (마쯔야마 신이치, 松山眞一)

도쿄 이케부쿠로에서 태어난 교쿠토카이는 일본 축제등에서의 노점을 관리하는 가장 큰 조직(데키야,的屋)으로 조규화가 1993년 사대 회장 다나카 하루오(田中春雄)가 사망하자 조규화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현재 1200여명의 조직원이있고 조규화는 1927년생으로 올해 87세의 나이로 현역으로 조직을 지키고 있다. 경북 의성 출생으로 한살때 일본으로 건너가게되었고 165센티미터의 단신이지만 싸움에 져본적이 없다고 한다. 비즈니스적인 마인드로 어프로치를 하고 있는 조직으로 현재 그들은 스스로를 조직인으로 사업가로서 생각하고 있고, 교쿠토카이 소속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다. 조규화는 요코하마 조선소에서 일을 하다가 전쟁이 났고 그러는 전쟁동안 부모와 이별을 하게 되고 한국으로 부모는 떠나고 혼자 남겨져 거리에서 자랐고 차후에 교쿠토카이의 전신인 교쿠토세키구치카이(極東関口會)의 회장 세키구치 아이지를 만났을때 조규화는 큰 감명을 받았고 그 것이 협객, 사무라이와 같은 스피릿을 받았다. 일본의 주요 정치인뿐만 아니라 민단으로 활동하며 노태우전 대통령의 일본 방문때 친분을 쌓는가하면 최배달,역도산,야구선수 장훈등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야쿠자세계에서 최고 원로이자 큰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교쿠토카이 오대 회장 (五代目極東会会長) - 조규화 (마쯔야마 신이치, 松山眞一)



마쯔바카이 칠대 회장 (六代目松葉会会長) - 이춘성 (마키노 쿠니야스,牧野国泰)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현재 약 2000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마쯔바카이의 육대 회장 이춘성은 조규화와 1996년 케쯔엔사카즈키(血縁盃, 혈연배)를 한 사이면서, 수미요시카이의 육대 회장 니시구찌 시게오 (西口茂男)와 형제관계이기도 하다. 야쿠자 세계에서 그는 협객으로 큰 존경을 받고 있고 군마현에 있는 마쯔바카이의 가장 강력한 2차 조직인 기타간토오쿠보이까에서 10대 회장이 되며 마쯔바카이의 회장에 오를 수 있었고 마쯔바카이의 8대회장은 2차 조직인 신오쿠보이까(大久保一家)의 11대 회장 오기노요시로가 현재 회장으로 이춘성의 부하였던 사람이다.


마쯔바카이 칠대 회장 (六代目松葉会会長) - 이춘성 (마키노 쿠니야스,牧野国泰)



후쿠하쿠카이 삼대 회장 (三代目福博会会長) - 김인순 (나가오카 토라오, 長岡寅夫)후쿠오카를 베이스로 하고 있는 후쿠하쿠카이는 야마구찌구미의 제안으로 후쿠오카의 여러조직이 후쿠하쿠보쿠카이(福博睦会)라는 조직을 결성하며 연합조직으로 1990년 후쿠하쿠카이가 탄생하고 2006년 한국계인 김인순이 회장직에 올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후견인으로는 야마구찌구미의 회장 츠카사 시노부였다. 현재 약 300여명의 조직원이 있다. 후쿠하쿠카이의 2차 조직인 우이카이(羽衣会)의 2대 회장의 자리에서 후쿠하쿠카이의 회장이 되었다.


2대 우이카이 회장때 겸했던 2대 후쿠하쿠카이 시절때 이사장이었던 김인순



큐슈세이도카이 초대 회장 (初代九州誠道会会長) - 박식만 (무라카미쇼지로, 村神長二郎)

큐슈세이도카이 이대 회장 (二代目九州誠道会会長) - 박정호 (나미카와 마사히로, 浪川政浩)

후쿠오카의 오무타 지역을 베이스로 도쿄를 포함한 5개의 현에서 활동하고 있는 400여명 규모의 조직으로 큐슈의 대표적인 야쿠자 조직인 도진카이 (道仁会)와 회장 계승문제로 대립 후 독립한 무라카미이까를 포함한 2차 조직들이 뭉쳐 만든 조직으로 앙숙관계가 되었고 2011년에는 도진카이 조직원들이 세이도카이 조직원들을 살해하며 심지어 수류탄,기관총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촉발되었고 세이도카이의 조직원은 도진카이 회장의 집에 기관총과 폭탄을 사용하였지만 살인미수에 그쳤고, 세이도카이 산하 조직 중 마약및 고리대금등으로 강력한 세력을 확장해왔던 무라카미이까는 일본에서 보기 힘들었던 무기 AK47을 사용하면서 러시아 마피아의 연계성이 있다는 의심을 받고있다. 이 무라카미이까의 삼대 회장이 박식만이고 세이도카이의 초대회장이 된다. 박식만은 2008년 마약관련으로 체포되었고 박식만의 직속부하이자 무라카미이까의 사대 회장 박정호가 세이도카이 이대 회장이 되었다. 야마구찌구미의 고도카이 다음으로 제일 큰 2번째 산하 조직인 고베의 야마켄구미 (山健組, 찬란했던 삼대 야마구찌의 회장 타오까 카즈오의 심복이었던 야마모토 켄이치 山本 健一가 초대 회장)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큐슈세이도카이 회장인 박정호




이외에 야마구찌의 간부급은 아래와 같다.


山口組系暴力団幹部 - 이창윤

山口組系「天野組組長」 - 김정기

山口組系「極心連合会組長」 - 강홍문

山口組若頭補佐「正木組組長」 - 박연남

山口組幹部(最高顧問)- 박태순

指定暴力団山口組系幹部 - 김정후

山口組系「新川組組長」 - 신양만

山口組系幹部 - 여만호

山口組系暴力団幹部 - 강정훈

山口組系組長 - 김규환

山口組弘道会系組長 - 박문수

山口組系組長 - 김정기

山口組暴力団幹部 - 오상성



이렇게 알아본 바와 같이 일본점령기와 전쟁, 그리고 일본내의 차별로 인해 한국인들이 야쿠자의 자본과 형성이 크게 발전하는 전쟁 전후에 깊숙이 관련되며 발전해왔고 본 글의 서두에 알아봤던 일본내의 부호들(일본내의 한국계 부호들은 한국내의 10대 부호와는 다르게 전부 자수성가했다.) 중 한국계가 인구 비율적으로 많은 것과 같이 극적으로 다르지만 야쿠자 세계도 꾀 많은 한국계가 존재하고 실질적으로 중요 직책에서 활동하는 간부급들이 많다. 여러가지 앵글에서 바라봐도 극적으로 비슷한 포인트가 많아보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치적 스탠스로는 우익세력인 야쿠자들이, 현재 반한과 더불어 많은 한국계의 야쿠자에 대한 반한 메세지도 일고 있어 흥미롭고, 결코 이들의 행동을 서포트하지 않지만 하나의 역사의 시점으로 바라보면 유태인의 디아스포라도 비슷해보이고 성공한 미국과 유럽의 한국계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위기와 환경을 뛰어 넘으려는 한국인의 저력을 볼 수 있다는 포인트는 주목해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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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 O.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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