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야쿠자
야쿠자 조직원들 중 많은 부분이 한국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우선 본 포스팅은 어떻게 일본인구의 0.5% 밖에 차지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그렇게나 많이 야쿠자와 연계되었는지를 대략적으로 알아보고, 현재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야쿠자를 알아본다. BSL은 야쿠자를 동경한다거나 그들의 행동이 응당하다고 전혀 생각하고 있지않음을 우선 밝히고 시작합니다.
(*정확한 한국계 야쿠자들의 %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이지만, 최대 70%가 한국계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일본 경시청에서는 10%가 한국계 70%가 부락민이라고 하기도 한다. 귀화등의 이유등으로 정확한 수치는 불가능해보이지만 야쿠자 조직원의 상당수가 한국계인 것은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본론에 앞서 우선 일본내 부호 Top 10을 알아보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포스팅 시점에서 Forbes에 리스트된 일본 내 부호 Top 10
포브스 일본내 부호 기준으로
2014년 드디어 역사상 한국계인 손정의가 유니클로의 타다시 야나이를 뛰어넘는 일본내 최고 부호로 자리메김하게 되었다.
2014년 현재, 소프트 뱅크의 마사요시 (손정의, 재일 2세)이 #1, ABC 마트의 마사히로 미키(강정호, 재일 2세)가 #10, 빠칭코계 대부 마루한의 한창우(한국 태생)가 #12에 랭크
2013년 - 손정의가 #3, 한창우가 #8, 강정호가 #12에 랭크
2012년 - 손정의가 #3,한창우가 #10,강정호가 #14에 랭크
애플의 Iphone을 일본으로 소개한 Softbank의 손정의 인생은 그야말로 드라마이다. 한국의 기업들과 달리 자수성가하여 부호에 오른 그는 후쿠오카 태생의 그는 일본내 차별을 피해 16살의 나이로 홀몸으로 미국 유학을 결심, 그리고 UC 버클리와 LA에서 경제와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후에 교세라에 합병되는 Unison이라는 오클랜드의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1981년 Japan Telecom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Softbank는 1994년 J Phone, 2003년 Vodafone Japan KK를 거쳐 2006년 현재의 이름 Softbank가되며 현재 강호 온라인과 미국의 Top5의 핸드폰 서비스업체 Sprint의 대주주이자 야후및 Alibaba의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거대 회사가 되었다. 약 20조(20빌리언 달러)를 보유한 손정의는 한국의 제일 부호인 이건희의 거의 20배에 가까운 재산 보유액이다. (이재용이 3대 부호여서 삼성으로 따지면 숫자는 달리지겠지만서도)
이렇게 손정의와 같이 자수성가한 한국계 사람들이 있었는가하면, 다른 어두운 방향에서도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들은 정건영 (마치이 히사유키,東声会 도세이카이 초대회장)와 신병규(지로 키요타, 稲川会,일본 3대 야쿠자 이나가와카이 5대회장)등의 야쿠자들이었다.
야쿠자들의 타투 (이미지 출처 : Google)
왼쪽부터 야마구찌구미, 수미요시카이, 이나가와카이, 쿄쿠류카이, 코자쿠라이까
아이즈코테쯔카이, 쿠도카이, 쿄세카이, 고다이까, 타이슈카이
(조직을 상징하는 이 심볼을 다이몽이라고 한다.大紋)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야쿠자 3대 조직인 야마구찌구미(山口組), 수미요시카이(住吉会), 이나가와카이(稲川会)를 알아본다.
수미요시카이(住吉会)
메이지 시대 도쿄 시바우라에서 도박꾼 무리들이 만든 범죄조직으로 초창기 이름은 수미요시이까로 시작했지만 1991년 수미요시카이로 개명하였고, 수미요시라는 이름은 초대장장 이토마쯔고로 ( 伊藤松五郎)가 도쿄의 수미요시쵸 출신이어서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마약, 불법무기, 인신매매등의 범죄와 연관되어 발전해왔으며, 현재 미국과 호주등에도 비주가 존재하는 조직으로 현재 아카사카에 본부를 두고 있고 2012년 2월 기준으로 12800여명 (5900여명의 준구성원 포함)이 조직원으로 두고 있다. 현재 6대째를 이어오고 있으며 현 소사이(총재,総裁)는 니시구찌 시게오(西口茂男)로 2002년 집권을 시작했다. 라이벌이자 도쿄 지역 확장을 하고 있던 야마구찌구미와 2007년 1월에 중역이었던 료이치 수기우라가 차에서 총으로 머리와 가슴을 맞고 사망하자 바로 야마구치구미에 대항한 총격을 가해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되었었다. (*야마구치 조직 산하로 들어간 코쿠수이카이와의 로뽕기의 영역권 싸움) 스미요시카이는 야마구찌구미와 조직적 연계가 없는 유일한 혼슈의 조직으로 라이벌 관계는 야마구찌의 현회장인 츠카사 시노부가 집권한 이래로 교제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나가와카이 (稲川会)
10000여명의 조직원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나가와카이는 현재 도쿄 로뽕기에 본부를 두고 있지만 원래는 시즈오카 아타미 지역에서 쓰루오카마사지로(鶴岡政次郎という)라는 도박조직에서 일하던 이나가와 가쿠지 (稲川角二)가 1949년 이나가와구미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이나가와이까를 거쳐 1972년 이나가와카이로 조직명이 변경되어왔다. 야쿠자조직으로 일본외 해외 지역에서의 활동을 가장 먼저 시작한 조직으로 조직의 수입원으로는 마약, 협박, 섹스산업으로 하고 있다. 이나가와카이의 오대회장은 한국인 신병규(일본명 키요다지로, 清田次郎)로 초대회장의 아들 이나가와토이의 뒤를 이었던 케이요나나이로이까의 보스였던 (京葉七熊一家) 쯔노다 요시오가 77세의 나이로 췌장암으로 2010년 사망하자 신병규가 5대회장에 오른다. 최대 조직인 야마구찌와의 관계는 신병규가 집권하면서 더욱 유해지는데, 야마구찌구미의 부두목인 다카야마 키요시 (高山清司, 위에서 설명한 바 있듯 야마구찌구미 회장 츠카사 시노부가 만든 고도카이의 2대회장이자 한국계로 아이치현 쓰시마에서 1947년 태어남. 신병규는 1940년생으로 알려져있음.)가 계승식에 참석하였고 교다이하이 (형제간의 건배, 兄弟杯)를 하기도하여 미디어에서도 크게 이슈가 되었다. 이 둘은 이전부터 관계가 있었던 사이라고 한다. 또한 야마구찌의 최대 2차 조직인 고도카이가 야마구찌를 점령한 것과 같이 신병규의 야마카와이까(山川一家)가 이나가와 5대를 점령한 것이어서 더 결속력을 다진다는 의미에서 더 큰 의미가 부여되었다.(*산께이신문 2010년 5월 2일자) 2011년 도호쿠 지진때에는 총 100톤이 넘는 라면, 식료품, 음료등을 제공하며 좋은 이미지를 만들려는 노력도 보여준 바 있는 야쿠자 조직이다.
2007년 사망한 이나가와카이 초대회장 이나카와 가쿠지 (稲川角二). 말미부분에 신병규도 보인다.
야나가와카이를 주제로 한 야쿠자 시리즈물, 실록 야나가와카이 잘 알려진 사실과 같이 일본 야쿠자는 우익적인 성향을 갖고 있고, 한국계 야쿠자들은 한국 정부와의 긴밀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일본 한국계 야쿠자의 시작을 알렸던 긴자 호랑이 정건영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한국정부를 위해 조총련에 대한 압박은 물론 일본의 정치, 경제면에 있어서 중요 정보를 한국에 넘김으로서 신임을 얻어갔고, 김대중 납치 사건, 한일 국교 정상회담등도 역시 정건영과 한국계 야쿠자의 힘으로 이뤄질 수 있었고 댓가로 부산-시모노세키간의 페리, 제주도 관광 개발에 있어서도 큰 여건을 마련해주게됨과 동시에 5억엔이라는 커미션을 챙겨가기도 했다. 1984년 12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 - 야마구찌구미와 수미요시카이의 조직원들이 제주도에 들어와 매춘과 도박을 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 5억엔의 커미션은 도쿄중심의 간토와 오사카, 고베의 간사이의 한국계 야쿠자 사이를 갈라놓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는데, 정건영측의 동성회가 착복하게 됨으로 발단이 되고 양측간의 단교가 되며 각자의 길을 걷게 되며 양원석의 야나가와구미와 함께 동성회도 경시청의 해산압박으로 해산이 되며 야나가와구미와 달리 동성회는 동아우애사업조합(東亜会, 도아카이)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조직이 형성되며 4개로 분리된 이 조직은 야마구찌 산하로 들어가게된다. 1990년부터 2008년 약 20여년동안의야쿠자 조직의 흐름 현재 한국계 야쿠자 조직원으로 알려져 있는 중요 인물들의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이나가와카이 오대 회장 - 신병규(일본명 키요다지로, 清田次郎) 야마구찌 육대 부두목 - 다카야마키요시 (高山清司) 고다이까 오대 회장 (五代目合田一家総長) - 이대강 (일본명 야마나까다이야스시,山中大康) 고다이까 칠대 회장 (七代目合田一家総長) - 김교환 (일본명 마코토 수에히로, 末広誠) 아이즈코테쯔카이 사대 회장 (四代目会津小鉄会会長) - 강외수 (다카야마 도쿠다로, 高山登久太郎) 오소아이카이 오대 회장 (五代目双愛会会長) - 신명우 (타카무라 아키라, 高村明) 사카우메구미 육대 회장 (六代目酒梅組組長) - 신영렬 (오야마 코지, 大山光次) 사카우메구미 칠대 회장 (七代目酒梅組組長) - 김재학 (카나야마 코자부로, 金山耕三朗) 사카우메구미 팔대 회장 (八代目酒梅組組長) - 남여일 (미나미키 미야비, 南喜雅) 교쿠토카이 오대 회장 (五代目極東会会長) - 조규화 (마쯔야마 신이치, 松山眞一) 마쯔바카이 칠대 회장 (六代目松葉会会長) - 이춘성 (마키노 구니야스,牧野国泰) |
소쿠하이카이 삼대 회장 (三代目福博会会長) - 김인순 (나가오카 토라오, 長岡寅夫)
큐슈우세이도카이 초대 회장 (初代九州誠道会会長) - 박식만 (무라카미쇼지로, 村神長二郎)
큐슈우세이도카이 이대 회장 (二代目九州誠道会会長) - 박정호 (나미카와 마사히로, 浪川政浩)
중요인물을 살펴 보자면,
이나가와카이 오대 회장 - 신병규(일본명 키요다지로, 清田次郎)
이나가와카이 오대 회장 - 신병규(일본명 키요다지로, 清田次郎)
야마구찌 육대 부두목 - 다카야마키요시 (高山清司) 한국계로 알려져있지만 정확한 자료는 나와있지 않아보인다. 1947년생으로 아이치 쓰시마 출신으로 야마구찌의 츠카사가 감옥에 있을때 대행을 했던 현 야마구찌의 부두목으로 2010년 공갈혐의로 체포된 적이있다. 10대때부터 범죄 생활을 시작해 20대때 나고야의 야마구찌구미의 조직인 사사끼구미(현재의 고도카이 산하 조직)에서 조직원 생활을 시작하며 살인혐의로 1973년 감옥에서 4년형을 살고 나왔다. (청년기에 우에다 토베라는 한국계 일본인의 살해혐의로 형을 살기도 했다.) 2010년 건설관련 협박등의 혐의로 체포 되었지만 2012년 150억의 돈을 내고 석방되었다. 야쿠자 조직원 초기 시절 닛뽄도를 들고 싸우다가 한쪽 눈을 다쳐 나고야의 네눈박이 (両目)라는 별명이 있다. 야마구찌 육대 부두목 - 다카야마키요시 (高山清司) 고다이까 오대 회장 (五代目合田一家総長) - 이대강 (일본명 야마나까다이야스시,山中大康) 야마구찌현의 시모노세키의 조직으로 1948년 결성된 조직으로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찌에 반하는 세력 중 하나로 야마구찌현에서 가장 큰 조직의 세력으로 알려져있고 1987년 한국인 이대강이 오대 회장에 오른다. 1977년 10월 22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20일회라 불리는 9개파가 10월 20일 당시 고다이까의 부두목이었던 이대강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 한국으로 단합대회 원정을 와서 고려병원 뒤의 요정에서 단합대회를 하려던 것을 서울시경이 정보를 입수하여 저지하였다는 내용이있다. 경향신문에서 이대강을 재일교포 야쿠자로 기사화 고다이까 칠대 회장 (七代目合田一家総長) - 김교환 (일본명 마코토 수에히로, 末広誠) 2010년 자료로는 180여명의 조직원을 갖고 있는 고다이까는 오대회장에 이어 칠대 회장도 한국계인 김교환. 2009년 9월에 칠대 회장에 오른 김교환은 고다이까가 반야마구찌의 이미지를 벗어나게 한 인물로 2010년 나고야의 야마구찌의 고도카이 회장 (즉, 다카야마 키요시 -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야마구찌의 부두목이자 이 고도카이회장인 다카야마 키요시는 주중에는 야마구찌 본부에서 주말에는 나고야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을 직접 찾아가 인사해 두 조직의 공존을 다졌다고 한다. 고다이까 칠대 회장 (七代目合田一家総長) - 김교환 (일본명 마코토 수에히로, 末広誠) 아이즈코테쯔카이 사대 회장 (四代目会津小鉄会会長) - 강외수 (다카야마 도쿠다로, 高山登久太郎) 신병규 이전 가장 큰 조직을 이끌었던 아이즈코테쯔카이의 강외수. 야마구찌구미, 수미요시카이, 이나가와카이의 뒤를 잇는 조직인 아이즈코테쯔카이의 사대 회장이었던 강외수는 1986년 회장에 취임, 1997년 야쿠자의 불문율을 깨고(쿠미쵸 즉, 회장이되면 죽을때까지 집권한다.) 은퇴후 2003년 사망한 인물로 한국계로서 동포들을 위해 많은 지원을해 주어 아이즈코테쯔카이의 활동 영역인 쿄토와 시카켄 지역에서 그를 모르는 동포는 없었다고 한다. 그는 경남 진주출신의 부모아래에서 오사카에서 태어난 강외수는 부모의 높은 교육열로 인해 명문 오사카부립상고를 졸업하였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취직을 할 수 없었고 골재채취 노무자로 사회에 나섰는데, 당시 골재채취권은 야쿠자의 비즈니스였고, 마찰이 많아지고 학창시절 스모선수였던 그가 야쿠자들을 떼려눕히기 시작하며 눈여겨 보던 나카가와구미가 그의 나이 19세에 그를 스카웃하며 야쿠자에 입문하게 되는데 초기 시절 싸움에서 사람을 죽게해 미성년자였기에 6년형을 받고 홋까이도에서 형생활을 했다. 한국 전쟁때는 민단의 600여명을 모아 지원병을 소집기도 하는가하면, 경주의 나라셋마을의 매년 2천만원의 지원, 1988년의 거액 성금, 한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외수장학재단을 설립하는 등 한국을 위해 선행을 배풀어 많은 본을 보여주었다. 민단 중앙본부 위원이기도 했던 그는 한국에서는 그에게 2003년 국민 훈장을 수여했다. 1970년대의 오사카와 쿄토지방의 전쟁을 정리하는 큰 공로를 인정받고 좋은 수완으로 성장하여 1986년 아이즈코테쯔카이의 회장에 오른다. 간암으로 75세의 나이에 사망한 그는 장례식도 조용하게 치뤘다고 하며 그의 아들은 야마구찌구미의 2차조직인 오미이까 (淡海一家)의 초대회장인 다카야마 요시유키(장남, 한국이름 강의행, 高山義友希)이다. 2003년에 코도카이에 가입하면서 오미이까를 만들게 되고 2009년 직계조직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강의행씨는 공갈혐의로 체포 2013년 10년형을 받는다. 몇몇 책에서 소개된 바에 따르면 이 장남 강의행씨가 아버지의 힘을 바탕으로 건설업등을 하다 몇백억엔의 빚을 지게하여 강외수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게 하여 아버지가 스스로 회장직에서 내려오게 만들었고 그후 그는 아이즈코테쯔카이와의 마찰을 피해 야마구찌구미로 가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야마구찌의 전설 야나가와구미의 2대 회장인 강동화와 친구관계여서 야마구찌의 교토로의 진입을 도와 조직의 성장과 함께 좋은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이 강외수에 대한 일대기는 한국 영화 일본 대부(1989년작)가 상영되었었다. 아이즈코테쯔카이 사대 회장 (四代目会津小鉄会会長) - 강외수 (다카야마 도쿠다로, 高山登久太郎) 아이즈코테쯔카이 비디오 - 여러 장면에서 강외수 등장 오소아이카이 오대 회장 (五代目双愛会会長) - 신명우 (타카무라 아키라, 高村明) 치바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직으로 1950년대 조직되었으며 1972년에는 이나가와, 정건영의 도아카이이,수미요시카이와 함께께 관동21일회(関東二十日会, 간토하츠카까이)의 멤버로 현재 230여명의 조직원이 활동하고 있는 조직으로, 1992년 부두목이었던 신명우가 회장에 취임. 오소아이카이 오대 회장 (五代目双愛会会長) - 신명우 (타카무라 아키라, 高村明) 사카우메구미 육대 회장 (六代目酒梅組組長) - 신영렬 (오야마 코지, 大山光次) 사카우메구미 칠대 회장 (七代目酒梅組組長) - 김재학 (카나야마 코자부로, 金山耕三朗) 사카우메구미 팔대 회장 (八代目酒梅組組長) - 남여일 (미나미 요시마사, 南喜雅) 오사카를 중심으로 200여명의 조직원이 활동중인 도박계 야쿠자 조직으로 한국계가 6대, 7대, 8대 회장을 맡았고 현재에는 9대에 이르렀다. 6대의 신영렬은 수십억엔의 부채를 안고 실종되었고 친동생인 야마구찌찌오먀아구미 회장인 오야마 다케시도 금전적인 문제로 도망다니다 파문(하몽, 破門)당함. 칠대 회장 김재학은 가나야마구미 (金山組)회장으로 칠대회장에 올랐던 김재학은 야마구찌구미의 다쿠미구미(宅見組),마쯔야마구미 (松山組), 오이시구미(大石組)의 회장들과 형제 관계이다. 또한 김재학은 강호동 야쿠자 스캔들의 중점에 있는 인물로 1988년 고등학생이었던 강호동이 오사카에서 열렸던 야쿠자 행사에 참여했다고 채널A에서 2011년 뉴스를 냈는데, 그 행사는 부산 칠성파의 두목 이강환과 사카우메구미의 칠대 회장이었던 김재학의 교다이사카즈키 (兄弟盃)였다고 한다. 사카우메구미 팔대 회장 남여일은 1951년생으로 2010년 회장자리에 올랐다. 김재학회장 시절부터 관계를 더 찐하게 맺었던 야마구찌구미와의 관계가 현재 9대에 까지 이어오는 듯하다. 야마구찌의 요시무라미츠오구미가 사카우메구미의 9대 회장의 생일 축하하기 위해 방문했다는 내용. 교쿠토카이 오대 회장 (五代目極東会会長) - 조규화 (마쯔야마 신이치, 松山眞一) 도쿄 이케부쿠로에서 태어난 교쿠토카이는 일본 축제등에서의 노점을 관리하는 가장 큰 조직(데키야,的屋)으로 조규화가 1993년 사대 회장 다나카 하루오(田中春雄)가 사망하자 조규화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현재 1200여명의 조직원이있고 조규화는 1927년생으로 올해 87세의 나이로 현역으로 조직을 지키고 있다. 경북 의성 출생으로 한살때 일본으로 건너가게되었고 165센티미터의 단신이지만 싸움에 져본적이 없다고 한다. 비즈니스적인 마인드로 어프로치를 하고 있는 조직으로 현재 그들은 스스로를 조직인으로 사업가로서 생각하고 있고, 교쿠토카이 소속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다. 조규화는 요코하마 조선소에서 일을 하다가 전쟁이 났고 그러는 전쟁동안 부모와 이별을 하게 되고 한국으로 부모는 떠나고 혼자 남겨져 거리에서 자랐고 차후에 교쿠토카이의 전신인 교쿠토세키구치카이(極東関口會)의 회장 세키구치 아이지를 만났을때 조규화는 큰 감명을 받았고 그 것이 협객, 사무라이와 같은 스피릿을 받았다. 일본의 주요 정치인뿐만 아니라 민단으로 활동하며 노태우전 대통령의 일본 방문때 친분을 쌓는가하면 최배달,역도산,야구선수 장훈등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야쿠자세계에서 최고 원로이자 큰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교쿠토카이 오대 회장 (五代目極東会会長) - 조규화 (마쯔야마 신이치, 松山眞一) 마쯔바카이 칠대 회장 (六代目松葉会会長) - 이춘성 (마키노 쿠니야스,牧野国泰)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현재 약 2000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마쯔바카이의 육대 회장 이춘성은 조규화와 1996년 케쯔엔사카즈키(血縁盃, 혈연배)를 한 사이면서, 수미요시카이의 육대 회장 니시구찌 시게오 (西口茂男)와 형제관계이기도 하다. 야쿠자 세계에서 그는 협객으로 큰 존경을 받고 있고 군마현에 있는 마쯔바카이의 가장 강력한 2차 조직인 기타간토오쿠보이까에서 10대 회장이 되며 마쯔바카이의 회장에 오를 수 있었고 마쯔바카이의 8대회장은 2차 조직인 신오쿠보이까(大久保一家)의 11대 회장 오기노요시로가 현재 회장으로 이춘성의 부하였던 사람이다. 마쯔바카이 칠대 회장 (六代目松葉会会長) - 이춘성 (마키노 쿠니야스,牧野国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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