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쁜 쪽으로
: 0 이하의 삶이 허락된 천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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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여운 사과를 얻기 위해 난생처음 서평을 쓰게 될 줄이야



  지나치게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머릿속에 가득 찬 나머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 김사과 작가가 꼭 그렇다. 

*

너는 훌륭하고 나는 거지 같지. 하지만 두고 보자. 결국 다 똑같아질 거야. 결국엔 모두 다 똑같이 좆같아진다. 노력해도 소용없어. 너도 알잖아. 그러니까 너도 노력하지 마. 일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나와 b> 중)

  김사과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2008년 겨울 무렵이었다. 예의 바른 문학 작품만 읽어온 나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수록된 <나와 b>를 읽고, 여태껏 무의식적으로 찾아 헤매던 어떤 불경한 것을 발견한 기분에 휩싸였다. 줄거리는 간단했다. 주인공 '나'는 친구 b와 함께 깡패와 사귀며 본드를 불고 죽은 깡패의 몸에 불을 지른다.

  이어서 읽게 된 장편 소설 <미나>, 단편집 <영이>에 담긴 이야기는 더 충격적이었다. 좋아하는 친구를 살해하게 되는 여고생, 아빠를 개가 될 때까지 패는 엄마, 식당에 가서 여자를 칼로 찌르고 집에 돌아가 엄마와 아빠를 때리는 회사원. 어느 하나 정상적인 이야기가 없었다. 폭력과 욕설이 난무했다. 단순히 엽기적이고 갈 곳 잃은 분노가 가득 찬 공격적인 묘사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김사과 작가의 유일한 미덕이라고 지레짐작하기 쉬울 만큼 그녀의 소설은 피투성이였다.

<나와 b>가 수록된, 김사과 작가의 첫 번째 단편집 <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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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쁜 쪽으로

  2010년 발표된 첫 단편집 <영이> 이후로 7년의 시간이 흘러, 김사과 작가의 두 번째 단편집 <더 나쁜 쪽으로>가 출간되었다. 1부와 2부는 2011년부터 2016년까지 발표된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고, 3부는 미발표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더 나쁜 쪽으로 내려가게 될 것만 같은, 감각적이고 인상적인 표지

  본 작품은 광기와 폭력이 들끓던 전작에 비해 외견상 차분해 보인다. 극단적인 묘사가 줄어든 대신 그 자리를 냉소, 꿈결과 같은 모호함이 안개처럼 채우고 있다. 그렇다고 이번 소설집이 온순하거나 만만하다는 말은 아니다.

  <더 나쁜 쪽으로>는 여전히 쉽게 읽히는 소설집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난해해졌다. 차라리 잔인하고 공격적인 묘사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라도 독해 자체는 쉬울 텐데, 한층 모호하고 분열된 서사, 꿈과 현실이 녹아드는 듯한, 혹은 서사 없는 서사의 흐름 속에 분열적이고 자폐적인 텍스트가 나열된 작품들, 심지어 다양한 언어가 오가는 실험적인 글들을 읽다 보면 명확한 줄거리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 버린다.

  김사과의 이번 작품집, 특히 1부와 3부의 글들은 그런 의미에서 음악에 가깝다. 서사가 희미한 대신 순간의 감정과 이미지가 선명하다. 그 밀도가 음악의 리듬처럼 변하고 클라이맥스와 추락이 있다. 파편화된 이미지와 메시지들은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서사에 얽매이지 않고 감각적인 리듬으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좋은 음악이 깊은 감정과 인상을 남기듯이, <더 나쁜 쪽으로> 역시 읽고 난 뒤에 어떤 이미지와 주제 의식이 머릿속에서 불길한 멜로디처럼 반복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작 장편 소설 <천국에서>에서 정점에 달했던 문제의식을, 외적인 표현 방식과 내적인 주제 의식 모두에 걸쳐 마치 깔맞춤 한 듯 전방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 나쁜 쪽으로>가 가지는 의미가 크다. 김사과는 본 작품을 통해 현시대의 세련된 문제적 '천국',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개인이 느끼게 되는 불안과 분노, 외로움을 집요하게 포착해내고, 이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욕망과 자포자기 혹은 '망함'의 정서는 혼란스럽게 뒤섞인 채로 꿈틀거린다.

  그렇다면 그 문제 의식의 실체는 대체 무엇인가? 쉽고 재미있는 소설도 많은데, 왜 고통스럽기까지 한 노력을 들여가며 난해한 작가의 작품을 읽어야 하는 걸까? 음악 같은 소설이라면 차라리 음악을 들을 것이지, 서사가 희미한 소설 따위를 쓰거나 읽는 것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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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를 읽는 이유

  김사과는 '나를 마조히스트로 만드는 소설가'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미셸 우엘벡의 장편 <지도와 영토>를 다루며, "지금 시대의 퇴폐와 쇠멸의 리얼리티를 제대로 담아내는 흔치 않은 작가이기 때문"에 우엘벡을 읽는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꽤 피곤한, 종종 역겨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조리, 반복해서" 읽는다.

  내가 난해하고 불편한 김사과 작가의 글을 읽는 이유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김사과 작가에 의하면 우엘벡은 "소설 쓰기를 통한 지도 그리기"하고 있는 셈이며, 이로써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엘벡의 작품 <지도와 영토>에는 "지도가 영토보다 흥미롭다."라는 구절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김사과 작가의 '지도'에 대한 생각은 이번에 발표된 단편집 <더 나쁜 쪽으로>에서 간접적으로 확장된다.

  1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3개 국어가 정신없이 교차하는 단편 <지도와 인간>의 제목은 <지도와 영토>의 오마쥬로 보인다. 소설에서 엄마는 딸에게 말한다. 완벽한 지도가 있고 그 위에 사람들이 있으며 딸 역시 거기에 있다고. 하지만 딸은 그것이 거짓말이고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지도가 필요했다 그녀는 인간들이 필요했다 그녀는 나를 가졌다
그녀는 지도를 가졌다 그녀는 인간들을 가졌다
그녀는 충분히 가졌다 아니 그녀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도가 될 것이다 그녀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지도와 인간> 중)

  자신이 그려놓은 지도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엄마. 그리고 "또 다른 개소리도 많이 들려주었다. 모르는 사람을 믿지 마라, 어른을 공경해라…… 그것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며 살아왔다."고 붕괴된 믿음을 이야기하는 딸.

  흥미롭게도 김사과는, <지도와 인간>에서 '지도'로 상징되는 한 개인의 바람 혹은 환상이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태도를 취하는 화자를 등장시켰지만, 소설집 전체적으로는 우엘벡의 글쓰기에 담겨 있는 방식과 유사한 시도를 했으며, "시대의 퇴폐와 쇠멸의 리얼리티"를 담은 '지도'를 그림으로써 세상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을 쓰는 행위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지도 그리기에 다름 아니며, 그러나 그렇다고 지도가 영토보다 흥미롭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심미적인 지도를 그리기 위해 영토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영토를 제대로 바라보고 그 위에 나 자신을 위치하기 위해 지도가 필요하다. 김사과는 본 단편집 <더 나쁜 쪽으로>와 작품 외적인 글 모두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녀가 제대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싶었던 그 영토는 무엇일까?

3
욕망, 그리고 천국

  난 말이야. 저렇게 관념적인 물질을 본 적이 없어. 저건 욕망이란 관념 그 자체야. 갖고 싶다, 갖고 싶은 마음 그것 자체. 그렇잖아? 그게 아님 저게 뭐겠어? 그게 아니면 저 괴상한 물건이 도대체 뭐겠냐고. 날 갖고 싶지? 날 사고 싶지? 이런 데서 살고 싶지? 그렇게 외치고 있잖아. 이건 내 귀에만 들리는 거야? 나는 저게 갖고 싶으니까? 근데 너는 그렇지 않으니까?
(…)
  물론 너는 저게 싫어. 전혀 원하지 않아. 하지만 이미 너도 우리들 중의 하나야. 그건 너나 내가 정하는 게 아냐. 그냥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니가 아무리 아니라고 주장해도 소용없어. 세상은 이따위로 생겨먹었어. 세상은 너 혼자 아름답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아.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무너져내리고 마니까. 그러니까 막으려고 들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가 저것들을 사랑하게 만들려고 할거야.
(…)
 너는 절대로 지면 안 돼.
(<풀이 눕는다> 중)


김사과의 소설 중 가장 낭만적인, 풀이 눕는다. 8년 만에 새로 개정판(우측)도 나왔다. 


  과시적이지 않은 과시, 낡지 않은 낡음, 오만하지 않은 오만함, 오직 타인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나를 봐, 갖고 싶잖아? 속삭이는 듯한 그들을 나는 외면하지 못한다.
(<더 나쁜 쪽으로> 중)

  <풀이 눕는다>에서 위와 같은 장황 하지만 순수한 외침과,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는 낭만적인 선언 및 행동을 통해 물질과 자본주의에 저항하던 화자는 <더 나쁜 쪽으로>에서 더 이상 그것을 "외면하지 못한다". 이러한 화자의 태도 변화는, 지난 세기의 '악'이 식민지 지배나 군부 독재, 강남으로 대표되는 천민자본주의와 같은 알기 쉬운 형태를 보였던 반면 21세기에서는 보다 교묘해진 형태로 우리 사회에 녹아들어 있는 상황과 맞물리며 작가의 문제의식이 보다 섬세해졌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과거, 비교적 명확하고 적은 수의 '적'이 존재하던 시절에 대해 김사과는 이렇게 묘사한다.

  아직 우리의 조국이 충분히 촌스러웠을 때, 아직 지드래곤이 힙스터 삘 양년들이랑 뉴욕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지 못했을 때, 우리의 적은 오직 코엑스, 타워팰리스, 대치동, (진부하게) 강남, 어, 그때, 병신같이 폼을 잡고 선 우리를 누구도 섣불리 비웃지 못했을 때, 그때, 아직 우리가 거기 없었을 때,
(<세계의 개> 중)

  좀 더 단단하고 확실한 윤리와 정의가 존재하던 그 시절,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경계하고 우리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윤리와 정의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고 개인화된 지금, 우리는 좀 더 안심하고 유혹에 빠져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놓고 누군가를 해치지 않으며, 좋은 것이니까. 우리는 세련된 젠트리피케이션 지역을 방문하여 맛있는 것을 먹고 풍족한 경험을 하며, 거대 기업의 편리한 전자 제품과 서비스를 누린다. 그 누구도 직접 다치게 하는 일 없이. 그렇다면 우리가 그 욕망을 거부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따라서 욕망을 가진 우리들은 더 이상 모호한 적을 구분하지 못하며, "아무 조건 없이, 원한 없이 우리는 투항한다" (<세계의 개> 중)

  자본주의 질서에 투항한 우리들은,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 아프리카 TV, 아이돌, 아이폰 따위로 보다 쉽게 만족하고, 주저앉는다. 그것들은 마침내 우리를 안전한 천국으로 이끌어 준다.

4
파편화된, 증오를 낳는 천국

  여기 되게 좋아. 무서워할 게 하나도 없거든. 모든 게 쉬워. 창밖 풍경은 평화로워. 나무로 만든 탁자가, 그 탁자 위로 비치는 햇살이 예뻐. 벽에 걸린 스피커에서는 근사한 노래가 나와. 커다란 개가 난로 옆에서 졸고 있어. 너무 평화로워. 모든 나쁜 것은, 해로운 것은 죄다 아주 멀리 있고, 좋은 것들만 나와 함께해. 아니, 그런 기분이 들어. 어, 여긴 요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수족관이야. 근데 나 더이상 여기 못 있겠어. 못 견디겠어. 나 망했나봐. 이 안에서 나 더이상 즐겁지가 않아.

  여기는 천국이고 나는 울고 있어.

  근데 써머, 여기가 진짜 천국이야? 써머 넌 그렇게 생각해? 정말? 진짜? 어떻게 여기가 천국이야? 내가 진짜 원하는 단 한가지가 빠졌는데? 아아, 나 이제 진짜 알겠어. 여기가 왜 이렇게 좋은지. 그건 제일 중요한 한가지가 빠져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거, 내가 진짜 원하는 거, 그게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평화로운 거야. 이 평화는 내가 원하는 그 딱 한가지를 버리고 얻은 거야. 그러니까, 여기는 천국이 아니야. 여기는 지옥이야. 여기는 지옥이야, 써머. 근데 문제가 뭔지 알아? 도대체 뭐가 빠져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야. 완벽한데, 여기는 너무나도 완벽한데...... 어떻게 뭐가 빠져 있을 수가 있지? 난 진짜 모르겠어. 근데 그 뭔가가, 그 빠진 뭔가가 밖에는 있을까? 확실해? 그게 뭔데? 나가면 보여? 손에 넣을 수가 있는 거야? 모르겠어. 난 정말이지...... 뭐가, 대체 여기에 없는 건지, 밖에는 대체 뭐가 있는지......

(<천국에서> 중)


  김사과는 전작 <천국에서>를 통해, 유래 없이 풍족한 물질의 소유가 가능해진 현시대의 우리가 맞이한, 물고기들이 안전하고 단조롭게 살고 있는 수족관에 비견할만한  '21세기형 천국'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녀는 이런 천국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관점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표백되고 파편화된 '개인주의자들을 위한 천국' 혹은 '이불속의 천국'.

  둘째, 유명 연예인 혹은 부러움을 살만한 타인의 천국, 즉 욕망과 시샘, 증오 심지어 혐오를 자아내기까지 하는 '비교 대상으로서의 천국'.

4-1

  첫 번째 '개인주의자들을 위한 천국'에 대해, 김사과는 소설과 에세이에서 각각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다시 눈을 뜨면 지금 여기 천국 안에서 우리는, 우리들만의, 눈과 귀가 먼 우리들만의 천국 안에서, 바깥의 지옥을 잊는다. 좀더 완벽하게 잊기 위해, 우리는 인도로 떠날 수 있다. 이비사 섬으로 향할 수도 있다. 물론 결국 아무데도 도착하지 못할 테지만.
(…)
  춤 속에서 우리는 거리를 유지한다. 껴안지 않는다. 각자의 춤에 몰두한다. 그렇게 우리들은 개인주의자들을 위한 천국으로 간다.
(<더 나쁜 쪽으로> 중)

  어쩌면 천국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들은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공짜로 많은 것을 얻고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정보를 얻고 소식을 즐기고, 그 결과 그들은 돈을 번다. 그들은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의 인터넷 아파트를 계속해서 새것으로 유지하고 보수하고 이따금은 더 멋진 집으로 이사시켜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안에서 계속해서, 기분 좋게 살아가면 되는 걸까? 그런데 왜 자꾸만 우리가 이상한 우산 속 세상에 살게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
  결과적으로 우리들은 몹시 바빠졌다. 너무 쉽기 때문이다. 손쉽게 '라이크'를 누르고, 손쉽게 전송하고, 손쉽게 리트윗한다. 더 자주, 더 많이 보고, 더 빨리 결정하고, 더 쉽게 욱하게 된다. 저 드라마는 지루하니까 쓰레기통에 버리고, 이놈은 나쁜 놈이니까 언팔, 자 여기 이달의 신상이 있다. 어서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 더 많은 것을 봐야 하고 그러니까 더 빨라져야 한다.
(<문학3 2017년 1호> '우산 속 세계' 중)

  인터넷을 통해 쉽게 연결되고 쉽게 처리하고 쉽게 욱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어느새 더 쉽고 안전하게 고립된다. 사회학자 엄기호 역시 소셜 미디어가 주는 즉시성의 환상은, 사실상 연속성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에는 수백 명의 삶의 일부가 파편화된 채 뒤섞여 나열된다. 심지어 그마저도 우리의 취향을 고려한 알고리즘에 의해 필터링되어, 미디어 버블에 갇힌 채로.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입맛에 맞고 안전한 이불속 천국에 도래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삶이 파편화되고, 더 즉시적이 되며, '동물화'하는 것을 누구도 막지 않는다. 아니 인식조차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마치 점점 데워지는 냄비 속의 개구리 혹은 꽃신에 익숙해져 맨발로 걸을 수 없게 된 원숭이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더 나쁜 쪽으로>의 서사와 표현 방식은, 그렇게 파편화된 우리의 서사를 쏙 빼닮았다. 단편적으로 흘러가는 우리의 감정과 인상, 단순한 욕망, 정신보다 물질과 육체에 집중하는 지금 이 시대를 표현하는 충격 요법으로, 일종의 미러링을 구사한 셈이다. 김사과의 1부, 3부 작품을 보면서 혼란스럽고 산만하며 역겹기도 하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느끼는 것은 따라서 자연스럽다. 김사과는 지금 우리 삶의 양태 역시 그러한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거울에 비추어진 그 모습을 다만 사실적으로 묘사하듯이, 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그려낸 것뿐이다.

  그런 천국에서 우리가 결국 마주치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새하얗게 표백된 인공 천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미 사람들은 단절되었고, "이곳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텅 빈 맥도날드에 앉아 빅맥을 먹는데 정말이지 외로웠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거리에, 내 옆에, 벽 안에, 벽 너머에......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누구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카레가 있는 식탁> 중)


4-2

  두 번째로 '비교 대상으로서의 천국'이 있다. 첫 번째 천국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통한 초연결 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즉각적으로 많은 것들을 쉽게 얻고 만족하는 듯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더 불행해지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엿본 유명 연예인 혹은 주위 사람들의 화려한 삶은, 순간 자신도 저 천국에 속해 있는듯한 착각에 기쁨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영원히 그곳에 도달하지 못할 자신의 현실을 깨닫는 순간 그 감정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그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 결핍에 대한 저주와 부풀어 오르는 욕망 -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최소한 사진 만이라도 비슷하게 - 과 같은 왜곡된 감정이 자라나기도 한다. 도달할 수 없는 천국을 엿본 사람이 느끼게 되는 그런 감정에 대해 김사과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지만 언제나 그리워 했던 듯한, 누군가는 오직 그 풍경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을 법한 그런 풍경이었다. 이런 곳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민정남은 덜컥 겁이 났다. 뭔가 봐서는 안 될 것을 엿본 기분이었다. 하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민정남은 눈물을 흘렸다. "여기가 당신이 사는 곳이란 말이야?"

  대답은 없었다. 민정남은 홀로 그 신비한 홀로그램 정원에 남겨졌다. 그는 울고 또 울었다. 그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이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것임을 알았다. 현실을 역겨워하며, 죽음을 저주하며.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끔찍한 증오 속에서, 무력감 속에서. 천천히 썩어갈 것임을 직감했다. 영원한 그리움 속에서.
(<이천칠십X년 부르주아 6대> 중)

  SNS나 여행을 통해 천국을 잠시 혹은 종종 맛보게 된 사람들이 그 천국에 자신이 영원히 속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충족될 수 없는 욕망에 대한 갈증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타인에 대한 비교가 지옥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타인의 천국 - 비록 그것이 '인공 천국'일지라도 - 에 접근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우리는 그 비극을 거부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그리고 정확히 그런 방향으로 우리의 천국은 조성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갈 예정이다. 비교할 천국이 눈 앞에 즐비한 상황, 천국을 인지하게 되어 그곳에 도달하고픈 욕망이 생겨나는 경우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쉬운 행동은 두 가지다. 돈이 있다면 그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돈을 탕진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곳에 절대 도달할 수는 없다는 불가능의 정서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수동적인 공격성과 무기력에 압도당한다.

  2부에 수록되어 있는 <카레가 있는 식탁>은 현 사회에 만연한 혐오가 이런 비정상적인 '천국'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가난한 고시원 생활을 하는 '나'는 스스로를 인간 혐오자라 생각한다. 누군가가 아주 역겨울 때, 혹은 따뜻할 때, 자신의 마음이 풀어지려는 상황이 오면 '나'는 혐오 기제를 이용하여 스스로를 통제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정신 승리에 불과하다. 작중에서 '나'는 버블티 여자에 대한 호감을 혐오 기제로 통제하는데, 이는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천국'(그녀와의 연애)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결국 타인(그녀의 남자 친구)의 세계를 잠시 엿보는 것에 불과하고, 자신이 속할 수 없는 세계 임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버블티 여자를 혐오하고 그녀를 스토킹 하거나 이불속에 파묻혀 있는 것 이외에 의미 있는 행동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비틀린 천국 안에서 과잉된 소외감과 박탈감을 키워나간 개인들은, 물질적으로 이전 세대보다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해하려는 이 강렬한 욕망을 막을 길이 없다." (<자음과 모음> 2015년 겨울호, '카레가 있는 식탁' 중)

  부정적인 감정을 타인에게 돌리지 않고 안으로 삭힌다 하더라도, 김사과 작가에게 현실은 그리 희망적이지만은 않다. 이 경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라나기 쉬운 허무주의, 노력해도 안될 것이라는 좌절감 혹은 절망감으로 인해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기 쉬운 연약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아마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필요로 하며, 결국 아무데도 닿지 못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중)

나는 아무것도 넘어서지 못했고, 결국 아무데도 닿지 못했다. 지도를 버렸지만 여전히 지도 안에 들어 있었다.
(<더 나쁜 쪽으로> 중)

  김사과는 이렇듯 번지르르한 '천국'에 속해 있는 개개인의 마음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지옥'을 포착해 면밀히 묘사하고 있다.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천국, 그리고 그 욕망을 계속해서 충족시키지 못할때 자라나는 분노 혹은 만성적인 좌절감. 우리가 이 천국에 만족하는 순간, 이 악순환의 고리는 더 견고해지고 말 것이다.


5
천국에서, 더 나쁜 쪽으로

  그래서 김사과 작가는 <더 나쁜 쪽으로>를 통해 지금 어디까지 왔고 어디까지 더 나아갈 생각일까.

  <더 나쁜 쪽으로>는, 매너리즘에 빠지고 싶지 않은 그녀의 전방위적인 시도와 실험, 성공, 그리고 실패가 고스란히 담긴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영토'를 담은 '지도'를 그리고, 또한 버리고자 하는 상충하는 욕망을 끌어안은 채, 일관된 목소리를 다양한 결의 글들이 모인 작품집의 형태로 구체화하는 쉽지 않은 작업을 해 냈다. 표백된 천국 안에서, 물질과 편리함에 휩싸여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마는 우리들의 욕망과 절망, 그리고 외로움에 대해 이토록 집요하고 세밀하게 묘사해온 작가를 나는 김사과 이외에 알지 못한다.

  1, 3부에 수록된 실험적인 작품들은 글의 형태와 외적인 묘사 자체에 메시지를 녹여 넣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으며, 미학적으로도 유의미한 결과를 낳았다. 일종의 미러링의 부작용으로써 난해함과 거부감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은 아쉽지만 흡인력 있고 정제된 스토리텔링과 주제 의식이 돋보인 2부의 작품들을 통해, 추후 타협을 거부하면서도 대중적인 설득력이 가미된 글이 탄생할 가능성에 기대를 하게 된다.

  "앙팡 스키조"라 불리며 주목받던, 문단의 발칙한 이단아 김사과가 "배가 나온 지방 유지 행세를 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오랜 시간 치열한 사유와 실험을 이어온 결과가 이 작고 예쁜 이백 페이지 가량의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기서 여전히 더 나아가려는 태도가 엿보이는 그녀가 선택한 표제작의 제목은 의미심장하게도, <더 나쁜 쪽으로>.

  더 나쁜 쪽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은, 더 안 좋아질 여지가 남아있는 현재가 그나마 좋은 상황인 셈이니 여기에 만족해라는 식의 긍정적인 메시지라고 보기 어렵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사과 작가가 붙인 제목이라면 더욱이. 열심히 하면 잘 될 거라는 식의 긍정주의 혹은 낙관주의에 대해 김사과는 그렇지 않다고, 이대로라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의해 자연스레 더 나쁜 쪽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헬조선'이라는 이름의 '천국'안에서, 김사과는 매번 더 나쁜 쪽으로 우리보다 한 걸음 더 앞서 나아갈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가 '동물화 하는' 우리를 스스로 발견하고 구원할 수 있도록. 그런 그녀의 무겁고 고통스러운 여정은 아마도 좀처럼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나는 그 긴 궤적을 언제까지나 좇아갈 생각이다. 희망도 절망도 없는 그녀의 종국을 향한 발자취를, 기꺼이 지지하며 응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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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June 2016.10.01 01:19 Posted by bslife
1.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모비딕>으로 잘 알려져 있는 19세기 소설가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Street)>


바틀비와의 첫 만남은 짧은 인터넷 기사에서였다. 스크롤을 내리다 '바틀비적' 이라는 낯선 표현이 눈에 밟혔다. 알고보니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인물에서 따온 말이었다. 정확한 맥락은 알 수 없었지만 바틀비가 소설 내내 반복하고 있다는 단 하나의 문장이 머릿 속에 들어와 콕 박혔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이런 느낌?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니,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얼 안 했으면 좋겠다는 걸까. 나 역시 하고 싶은 것 이상으로 안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막연히 공감했고, 동시에 관심이 생겼다. 바틀비의 자세한 사정이 궁금해 졌다. 그의 사연을 이해하게 되면 나도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 바틀비처럼 당당하게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면서 바틀비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뉴욕 월스트리트에 사무실을 차린, '가장 손쉬운 삶의 방식이 최고'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변호사는 새로운 필경사로 바틀비를 고용한다. 당시에는 복사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사본이 필요한 서류를 직접 손으로 옮겨 적는 '필경'이라는 일을 대신 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틀비의 첫 인상은 근면 성실한 청년이었다. 조용한 몸가짐에 굶주린 것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문서 작업을 기계적으로 척척 처리해 내는 바틀비가, 고용주 변호사는 마음에 쏙 들었을 정도였으니까.

바틀비는 이내 짐작했던 대로 훌륭한 '프로거부러'의 태도를 보여 준다. 어찌 저리 차분하면서도 완고히 거부 의사를 관철할 수 있는 건지 그 멘탈이 존경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다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정도가 너무 심했다. 바틀비는 '해야 하는 것'을 하나 둘 거부하기 시작한 끝에 결국 감옥에 끌려가게 되고, 심지어는 식사마저 거부하다 죽고 만다.


나씨나길의 끝판왕 바틀비


둘째, 실은 이게 더 당황스러운 부분이었는데, 바틀비의 거부에는 논리적인 이유가 없었다. 바틀비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왜 거부를 하는지 그 당위에 대해 제대로 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바틀비의 모습에는 얼핏 '갑'의 지시에 거부로 일관하는 '을'의 태도가 엿보인다. 그렇기에 평소 '갑'에게 당당하지 못한 우리들에게 잠시나마 사이다 같이 상쾌하고 통쾌한 기분을 선사해 준다. 그렇지만 이성적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남았다. 그래서, 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건데? 

변호사의 사무실에 취직해 열심히 일하던 바틀비는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성실하던 사람이 갑자기 일을 안 하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보통 특별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상사의 불합리한 태도라든지 업무의 부조리 같은 것들. 그러나 그런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강제로 야근을 시키는 일도 없었고, 상사의 고압적인 태도도, 기타 복잡 미묘한 정서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예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바틀비의 거부가 지나치게 뜬금 없는 나머지 고용주인 변호사의 답답한 심정에 더 공감이 갈 지경이었다. 거부의 징후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주어진 업무를 하루하루 열심히 수행하던 바틀비는 어느날 느닷없이 돌변해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안 했으면 좋겠다니?"

나는 그의 말을 되뇌며 몹시 흥분한 상태로 일어섰다. 그리고는 한걸음에 사무실을 가로질러 그에게 갔다.

"자네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제정신인가? 이 서류를 비교하는 일을 도와달란 말이네. 자, 받게!"

나는 그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중략)

"...요컨대, 하루 이틀간 조금만 합리적인 인간이 되겠다고 지금 말해달라는 걸세. 그렇게 좀 대답해 주게. 바틀비."

"현재로썬, 조금 더 합리적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대답은 온화하면서도 시체처럼 창백했다.





당황한 변호사가 바틀비에게 거절하는 이유에 대해 적접적으로 물었을 때도 그는 한결 같았다. 

"왜 거절을 하는 겐가?"

"안 하는 게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느낌적인 느낌


왜 안하고 싶냐 물었더니 안 하는게 좋기 때문이라는 대답이라니, 세상에. 일반적인 사회 생활에서는 절대 상상도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이런 바틀비를 흉내내거나 따라하다가는 대번에 쌍욕을 한 사발 얻어 먹거나 정신 이상자 취급을 받고 쫓겨날 것 같았다. 바틀비 운운하며 시키는 일을 하지 않겠다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도 납득시킬 수없는, 단지 이유없는 반항에 가까운 제스쳐에 불과한 듯 했다.


2.
'하지 않는 것'의 정치성 

바틀비의 난데없고 당황스러우며 고집스러운 거부가 끝내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질 무렵, 소설의 마지막 한 페이지 만큼은 그의 기이한 행동에 대한 변명 혹은 해명에 할애된다.

바틀비가 감옥에서 죽고난 후, 변호사는 바틀비가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수취인불명 우편 처리소' 말단 점원이었다. 이미 죽거나 사라져 버린 사람들을 향해 쓰여진 편지, 보내진 반지 따위의 물품들을 분류하고 소각장으로 보내는 작업을 매일같이 반복했을 바틀비. 희소식이 됐을 수도 있는 편지를 간절히 기다리다 결국 받지 못한 채 절망 속에서 죽어갔을, 수취인의 사연의 무게가 바틀비를 짓눌렀으리라 화자는 짐작한다. 바틀비와 인간을 향한 안타까움이 섞인 탄식과 함께 막을 내리는 이야기. 

여전히 구체적이고 그럴싸한 이유는 보이지 않지만, 바틀비를 단순히 정신이상자로 치부하거나 시덥잖은 '병맛' 캐릭터에 불과하다고 단정 짓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다.

덕분에 바틀비의 기묘한 태도, 조용하지만 올곧은 '하지 않음'은 질 들뢰즈,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쟁쟁한 철학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들에 의하면 바틀비의 태도에는 정치적이며 윤리적인 지점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일종의 마하트마 간디식 비폭력 운동 정신을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런거 말고


바틀비는 특별한 사명감이나 목적 의식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적극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부조리에 저항 한 것도 아니다. 바틀비는 다만 상급자가 시키는 일을 수동적으로, 조건 반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거부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단호하게 거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른바 소극적인 저항을 주체적으로 할 줄 아는 능동적인 인물이었고, 그것이 바틀비라는 캐릭터의 남다른 점이었다.

사실 바틀비의 행동은 표면적으로 보면 지나치게 예민한 소시민의 난데없기 그지 없는 생때 혹은 '을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 전반에 걸친 과장된 행동- 막무가내식 거부 - 과 얼핏 드러나는 바틀비의 과거 사연은 이 이야기를 일종의 상징 혹은 우화로 읽힐 수 있게끔 만들어 준다.

이를테면 바틀비의 거부는 월스트리트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중심지에서 자본가들의 편익을 도와준다 여겨지는 변호사의 '화이트 칼라'식 업무에 대한 거부를 상징할 수 있다. 책상 앞에 앉아 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 만으로도 수백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이익으로 치환할 수 있게 된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갑'은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얼마든지 잔인한 짓을 저지를 수 있고 심지어 그러한 행위조차 잘게 쪼개진 채 '을'들에게 분배되기 일쑤다. '을'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거시적으로 어떤 부조리와 부정적인 파급 효과를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보통 생각하지 않고, 그럴 여유조차 없다. 그렇게 희미하게 희석된 단순 업무를 밥벌이를, 생존을 위해 별 생각없이 받아 들이고 수동적으로 처리한다.

바틀비는 이러한 기성 프레임에서 벗어나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오'를 외치는 모난 돌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런 바틀비가 맞이한 비극은 예외적인 결말이라기 보다는, 안타깝지만 참으로 현실적이고 상식적일 뿐이다. 바틀비 같은 사람은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정상적으로 살아 남을 수가 없다. 즉 <필경사 바틀비>는 현실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있는, '소극적인 저항'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인물을 등장시키고자 만들어진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소극적인 저항'을 담은 일종의 우화라고 볼 때, 그토록 궁금했던 바틀비의 당위 혹은 거부하는 이유는 비로소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린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이유에 대해 아무도 중요하게 캐묻지 않듯이.

이러한 문학적 상징이 유별나고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는 <필경사 바틀비>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21세기 한국 작가 한강의 소설집 <채식주의자> 에서도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는 '바틀비 정신'의 보편성을 읽을 수 있다.



최근 맨부커 인터네셔널 상을 수상하여 화제가 된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작스레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해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중략)

"한번만 먹기 시작하면 다시 먹을 거다. 세상천지에, 요즘 고기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불만스러운 얼굴로 처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나, 웬만하면 먹어. 예, 하고 먹는 시늉만 하면 간단하잖아.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장인이 고함쳤다.

"무슨 얘길 하고 있어. 어서 팔 잡아라. 정서방도."
"아버지, 왜 이러세요."

(중략)

"누나, 그냥 좋게 먹어. 누나가 받아서 먹어."

영혜의 행동은 얼핏 바틀비의 그 것을 닮았다. 바틀비와 영혜는 고기를 먹는 일, 상사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과 같은, 남들은 다 당연스레 받아들이는 일들을 스스로의 의지로 거부함으로써 사회의 통념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자칫 어르신이 정성스레 차린 음식을 먹지 않고 반찬 투정이나 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영혜의 거부는 다수의 일반 사람들에게는 '고문관'의 '진상짓'일 뿐이다. 다수의 상식에 의해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따라서 교화되어야 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영혜는 결국 자신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는 가족들 덕분에 자해 소동을 벌이게 되고, 그 결과 정신 병원에 가게 된다. 이런 그녀가 육식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답하는 방식 역시 낯익은 구석이 있다.


"왜 고기를 먹지 않는 거지? 언제나 궁금했는데, 묻지 못했어."

(중략)

"꿈을 꿔서...... 그래서 고기를 먹지 않아요."
"무슨...... 꿈을 꾼다는 거야?"
"얼굴."
"얼굴?"

영문을 알 수 없어하는 그를 향해 그녀는 낮게 웃었다. 어쩐지 음울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이해하지 못하실 거라고 했잖아요."

영혜는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는 말에 엉뚱하게도 꿈을 꿔서 그렇다고 답한다. 왜 시키는 일을 하지 않냐는 질문에 안 하는게 좋기 때문이라고 생뚱맞게 대답한 바틀비와 닮은 꼴이다. 둘 다 유난을 떠는 사회부적응자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거기서 모든 이야기가 끝나 버린다. 그들은 이상한 사람들이었을 뿐이고, 이상한 행동으로 우리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므로 교정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들의 몸짓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그 곳에서 소극적인 저항을 읽어내는 순간 비로소 풍부한 사유가 시작될 수 있다. 소설가 김중혁은 이런 순간을 다음과 같이 포착한 바 있다.

"바틀비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는 말을 계속 보고 있으면 짜증이 나고 화가나고 우습기까지 하지만, 결국엔 그가 왜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어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타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반드시 상징을 구체적으로 따지고 드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필경사 바틀비>의 작가 허먼 멜빌은 월스트리트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를 상징하고자 바틀비라는 인물을 창조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에서 육식이 내포하고 있는 다른 생명체에 대한 폭력성에 주목하여 그러한 폭력에 대한 거부를 이야기하고자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라는 인물을 등장시켰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꼭 집어서 해석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닐 수 있다. 명확한 이유가 부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빈 자리에 채워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이 자유롭게 오고 갈 수가 있다. 물음표를 남기는 이런 이야기들을 구심점 삼아, 저항하고 거부할 필요가 있음에도 평소에는 의식적으로 구체화하지 못했던 여러 대상들에 대한 각자의 목소리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된다. 


3.
'열심히의 세계'에 대한 거부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정치적인 해석 이외에도, 바틀비는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또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제목부터 돌직구인 <안 해>라는 소설을 함께 읽으면 이 점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짧은 소설에는 '히키코모리 바틀비'라 불리기도 하는 흥미로운 주인공이 등장한다. 


박솔뫼 작가의 단편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에 수록된 <안 해>



주인공은 친구와 함께 노래방에 갔다가 감금 당한다. 친구의 생사 여부도 모른 채, 주인공은 노래방 주인에게 붙잡혀 그가 시키는 일을 하게 된다. 일부 줄거리만 보면 마치 범죄 스릴러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노래방 주인과 주인공이 보이는 태도가 사뭇 엉뚱하다. 노래방 주인은 주인공을 가둬 놓지만 딱히 돈을 요구하거나 알기 쉬운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다만 계속해서 이상한 설교를 하며 노래를 '열심히' 부르게 할 뿐이다. 피해자인 주인공은 이런 기묘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내내 졸리워 하면서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감금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기 보다는, '열심히' 하지 않으려고 할 뿐이다. 둘 다 평범한 범죄자와 피해자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나사가 빠져 있다. 그런 와중에 뜬금 없이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이 노래방 주인의 입에서 튀어 나온다.

너희는 도무지 열심히라는 것을 모르니까 삼십분간 내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에 대해 생각해. 열심히.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열심히.

(중략)

너는 새로운 자신으로 나아가야 해. 열심히의 세계로. 아름다움과 정신과 정열의 세계로 새로운 세계로 가야 해. 이러면 안 돼. 테이블이 부서질 때까지 자신을 부수고 테이블이 부서짐과 동시에 자신도 부수고 태어나야 해 새롭게.


노래방 주인이 주인공에게 하는 말은 납치범이 인질에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꼰대'가 '요즘 젊은 것들'을 향해 하는 설교에 가깝다. 구체적인 내용은 없지만, 그저 열심히 해야한다고 한다. 열심히 하지 않으려는 '너희'에게 '열심히'를 주구장창 강요한다.


새마을 운동 같은건가



그런 노래방 주인의 설교에 대해,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반발한다.

하지만 잘못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있다면 아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하지 않지? 하는 비뚤어진 교정 의식과 아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안 되지? 하는 피곤한 자학 이 둘뿐이었다. 

(중략)

무언가를 잘하게 되는 데 필요한 건 열심히가 아니라고 그게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로 보여도 당사자에겐 아니라니까 열심히가 아냐 무작정이 아니란 말이야 좀 더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 있는 항목이 당사자와 함께 달려 나가는 거에 가깝다니까. 뭐 양보해서 열심히가 중요하다고 쳐도 정말로 열심히의 세계가 있겠어? 있다 해도 그게 튼튼해?

마침내 노래방 주인이 방심한 틈을 타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은 노래방 주인을 묶은 뒤 마이크로 그의 머리를 몇대 툭툭 치며 이렇게 말한다. 

저는 열심히 하지 않고 할 생각도 없고 왜냐면 열심히의 세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도무지 열심히라는 것을 모르니까" 라며 '열심히의 세계'를 강요하는 노래방 주인에게 "저는 열심히 하지 않고 할 생각도 없고 왜냐면 열심히의 세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주인공. 임금을 지불하는 댓가로 당연히 해야하는 일을 지시하는 고용주에게 "하지 않는 것을 택하겠다"고 선언해 버리는 바틀비. 일에 굶주린 것처럼 지나치게 열심히 일을 하던 바틀비가 갑작스레 열심히 하지 않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도 있다. 긍정의 과잉이 낳은 반작용이다.

이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지적한 바 있는 '열심히'의 과잉이 초래한 이 시대의 질병, 지나친 피로와 무기력에 가깝다. 노래방 주인의 지독한 설교에서 마침내 빠져나와 자유의 몸이 된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는 다음과 같은 대사는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열심히 안 해 아무것도. 지금까지 열심히 한 적도 없지만 앞으로도 안 한다. 안 해 절대 안 해.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 '병원', 윤동주



'열심히' 하라는 강요는 결국,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안 하겠다는 정 반대의 다짐을 낳게 되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열성적으로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무한한 가능성과 자기 계발 만능의 사회를 온 몸으로 통과해 지나가면서, 오히려 무한히 펼쳐져 있는 선택지에 길을 잃은 채 압도되고 질식해 가는 모습이 만연한 사회.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열심히' 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보다 더 열심히 해야할 것만 같은 불안과 초조에 휩싸여 스스로를 끝임없이 채찍질 하고 그 결과로 보다 더 지치고 무기력해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렇게 소진되어 버린 책임은 제대로 '더 열심히' 하지 않은 개인에게 전가되는 것으로 악순환의 연결 고리가 완성된다. 


열심히 업무에 매진하던 바틀비가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다며 조용한 거부를 하는 것, '안 해'의 주인공이 노래방 주인의 열심히 하라는 설교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모두, 이런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지만 단단한 몸부림이다. 밑도 끝도 없는 근면 성실함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사회에서, 최소한의 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용기있는 목소리이자 최소한의 희망을 담은 몸짓이다. 


4.
다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과거에 비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때로는 과잉이기까지 한 지금 이 시대에, 개인적인 성취를 이뤄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변명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는 듯 보인다. 열심히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이유는 충분히 제대로 열심히 하지 않은 스스로가 문제라고 성공한 사람들은 말한다. 더 열심히 스펙을 쌓고 자기 계발을 하고 멘토와 힐링을 찾아 더 높이 성장하라며, 다양한 방식으로 개인을 다그치고 '성공'으로 몰아 붙이는 분위기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이러한 긍정의 과잉은 결국 반대 급부로 작용하여, 그 어느 시대보다도 급격히 증가한 다수의 무기력해진 개인들을 양산하고야 말았다. 

이 세상은 기회로 가득 차 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그 기회를 잡는다.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해서, 더 풍족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공부를, 일을, 자기 계발을, 노력 따위를 열심히 해야 한다. 이렇듯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소리 높여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너무 큰 나머지, 정작 '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은 줄곧 외면 받아 왔다. 이런 상황에서 가진 것이 없기에 더 열심히 일 해야할 것만 같아 불안한 우리들은 끝임없이 '노오력'을 해 보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비뚤어진 교정 의식'과  '피곤한 자학'이기 일쑤다.  

구글링을 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이미지들. 대한민국에서는 현재 자조적이고 해학적인 '노오력' '짤방'이 대유행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과잉 착취하지 않기 위한 거부. 불의에 대한 거부. 우리에게는 종종 이러한 '하지 않음'이 필요하다. 소극적인 저항이, 자기 스스로를 돌보는 행동이 필요하다. '열심히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영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다.  우리는 법적으로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반강제로 야근을 하고 불합리한 업무를 하고 주말 출근을 하는 것을 받아 들인다.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행위를 거부할 용기가 필요할 때조차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하던 대로, 시키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행동해 버리곤 한다. 우리는 딱히 불의로 가득 찬 사람은 아니지만, 습관대로 행동한 결과 작고 사소한 악을 낳고 방치하게 된다. 그렇게 수십억 인구가 낳은 아주 작은 악들은 서로 뭉치고 무럭무럭 자라나 우리를 옭아매는 채찍이 되어 되돌아 온다.
 
물론 바틀비의 워너비가 되어 거부하고 싶은 모든 것을 내키는 대로 그만둘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상적인 이야기인 것이 사실이다. 우리에겐 사회적 동물로서 주어진 최소한의 책임이 있고, 심지어 '금수저'라 해도 종류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떠한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는 예외가 없다. 또한 현실은 단순한 이분법으로 칼 같이 자르기 어려운, 복잡하게 엉킨 서로의 이해 관계와 사연들로 가득 차 있기에 쉽사리 온 몸을 던져 거부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우리가 무언가를 쉽게 거부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별가라면 가능하다


멈추지 않고 '열심히' 하는 행동 역시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깊이 있는 방향의, 적당한 '열심히'는 우리 모두에게 이롭다. 그러니까 여기서 핵심은, '적당한', 이다. 우리에게는 이 적당한 수준을 알기 위한 감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그저 받아들이고 거부할 줄 모르는 삶의 태도를 습관처럼 유지하고 있노라면, 그나마도 거의 퇴화되어 있는 그런 감각은 한층 더 둔해져 버리고 만다.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왜 열심히 해야 하는지, 무엇을 어떤 이유로 거부해야 하는지, 자신있게 판단하기 위한 '거부의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과 타인에 대해 보다 주의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또는 행동하지 않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백년도 더 된 가상의 인물 바틀비가 21세기 '열심히의 세계'에 사는 우리에게 남긴 하나의 문장. 그 짧은 문장에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잃어서는 안되는 것을 새삼 선명하게 마주할 수 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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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녀의 뇌는 다르다? 다르지 않다? 과학자들이 싸우는 이유?

 

작년 12, 인간의 뇌는 남성 혹은 여성 이분법으로 구분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논문(“Sex beyond the genitalia: The human brain mosaic”)이 저명한 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되었다. '마침내' 남녀의 뇌가 크게 다르지 않음이 밝혀졌다는 식의 기사들이 국내외로 쏟아져 나왔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 결과 및 대중 도서들이 남녀의 뇌가 '다르다'는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럴 만했다. 네티즌들은 댓글로 역시 차이가 없을 줄 알았다느니, 차이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둥 갑론을박하기 시작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남녀의 차이가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고 딱 잘라서 이분법으로 구분되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는 논문이었지만, 어찌 됐든 간에 성별에 대한 이슈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고 여기까지는 자연스럽고도 흔한 풍경이었다.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당 논문을 두고 과학자들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뜨겁게 싸우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그들은 대체 무엇을 두고 그렇게 오랫동안 싸우고 있는 것일까?

 

논문 저자인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교수 다프나 조엘(Daphna Joel)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명확했다. 남녀의 뇌가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뇌는 이분법적으로 남성 혹은 여성의 뇌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일종의 '모자이크 패턴'처럼 여성적인 부분과 남성적인 부분이 섞여 있는 것이다.




[조엘의 주장에 따르면, 남녀의 뇌는 남성적인 부분과 여성적인 부분이 모자이크 패턴처럼 섞여 있다.]

 

조엘의 연구팀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1,400개 이상의 뇌 촬영 자료를 분석했다. 하나의 뇌를 116개 부위로 나누고 평균적으로 남녀 간 차이가 가장 큰 상위 10개 부위를 골라낸 뒤, 성별 분포에 따라 '남성형', '여성형', '중간형' 세 가지로 분류했다. 한 개인의 뇌에 포함된 10개 부위가 모두 자신의 성별에 해당할 때 '내적 일관성' 이 있다고 간주하고, 이러한 일관성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지를 조사했다. 예를 들면 10개 뇌 부위가 모두 '여성형'으로 나타난 여성은 '내적 일관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만약 인간의 뇌가 여성 혹은 남성 딱 두 가지 분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면, '내적 일관성'을 갖춘 뇌가 높은 비율로 관찰되어야 한다는 것이 조엘의 가설이었다. 결과는 6% 내외에 불과했다. 따라서 우리의 뇌는 남성 혹은 여성 두 분류로만 딱 떨어져 나누어질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조엘은 해석했다. 우리의 뇌가 그렇다면, 다른 행동들은 어떨까? 5,500명 이상의 개인적인 특성, 행동 데이터에도 같은 분석을 시행해 유사한 결과를 얻었다. 이를 통해 조엘은 남녀의 뇌와 개인적인 특성은 이분법적으로 분류될 수 없고, '남성형', '여성형', '중간형' 이 모자이크 조각처럼 섞여 있을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는 많은 양의 데이터를 새로운 방법론으로 분석해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해낸 훌륭한 시도라고 평가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점부터였다. 조엘의 연구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주장들이 몇 개월에 걸쳐 학술지에 수차례 실리기 시작했다. 학술지에 편지를 보낸 과학자들은 조엘의 연구가 잘못된 방법론을 취했으며, 오도하는 해석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조엘의 연구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새로운 분석 방법을 적용하거나 새로운 데이터를 분석하는 수고스러움까지 마다치 않았다. 조엘은 그들의 논의를 환영했다. 재미있게도, 그 과정에서 조엘과 그들은 종종 같은 데이터와 분석 방법을 가지고도 각자 다른 관점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연구자는 조엘이 사용한 '내적 일관성'의 개념이 지나치게 극단적이어서 명백히 구분되는 다른 종간의 데이터를 같은 방법으로 분석하더라도 항상 낮은 비율의 일관성이 관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조엘은 이에 대해 일관성의 반대급부로 계산되는 '다양성' 수치를 추가로 살펴보면 차이를 볼 수 있다고 답했다. 즉 같은 분석 결과를 두고도 '내적 일관성' 값에 초점을 맞추어 문제를 제기한 연구자가 있는 반면, 조엘은 다른 값을 함께 고려해보면 문제가 없다고 했다. 보통은 더 많은 요소를 함께 고려하는 후자의 태도가 더욱 바람직하지만 이 연구의 핵심이 다른 무엇보다도 '내적 일관성'이 남녀 모두에게서 매우 낮았다는 것임을 고려해 볼 때, 어느 한쪽의 관점이 반드시 옳거나 틀리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모자이크 패턴일지라도 다른 분석 방법을 사용하면 남녀 뇌가 충분히 구분된다는 분석 결과를 제시한 연구자도 있었다. 조엘은 그런 식으로 분석할 경우 정보가 변형되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답했다. 같은 분석 결과인데도 그 연구자는 남녀의 뇌가 두 분류로 구분될 수 있다, 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조엘은 구분할 방법이 생물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조엘은 이 데이터를 이용해 남녀의 뇌가 구분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했지만, 몇몇 연구자들은 다른 방법으로 분석할 경우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왼쪽이 여성 그룹, 오른쪽이 남성 그룹. 분홍색이 여성적인 부분, 파란색이 남성적인 부분.]

 

이것은 과학 논문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으나 관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과학적인 논쟁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과학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희미하게 각자의 가치관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조엘은 애초부터 남녀의 뇌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논문을 검색해 본 결과, 그녀는 최소 5년 전부터 그런 주장을 일관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엘의 논문을 공격하는 과학자들은 마치 남녀의 뇌를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할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엘은 굳이 구분되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선택적으로 이용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즉 조엘이정치적으로 올바른주장 - 남녀의 뇌는 평등하다 - 을 하기 위해 연구를 하고 논문을 발표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두고 있었다.

 

2.과학적 올바름 vs 정치적 올바름?

 

과학자들은 객관성이 중요한 연구 활동에조차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저명한 인지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존 브룩만의 저서 위험한 생각들에서 과학에조차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에 대한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하버드대학의 래리 서머스 총장이 통계적으로 볼 때 남성과 여성은 인식능력과 삶의 성취도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하자, 맹렬한 반대가 일어났다.

 

이러한 가설은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위험한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서머스 총장은 여러 달 동안 온갖 구설에 시달렸고, 민족적 인종적 차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검열을 당하거나, 폭력의 표적이 되거나 나치에 비유되고 있다. 광범위한 지적 영역에서는 이런 가설들을 아예 처음부터 논의의 대상에서 배제해버렸다. 인종이란 존재하지 않고, 지능도 존재하지 않으며, 정신이란 부모들에 의해서 채워지는 빈 서판일 뿐이라고 본다.

 

집단 간의 차이에 대한 연구가 편협한 행위를 자극할 것이라는 잠재된 두려움에도 근거는 있다. 위험을 줄이려고 지적 도구들을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사실is' '의무ought'를 내포하지는 않는다. 집단에 따른 차이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 말은 통계 분포상으로 보았을 때의 평균값이나 편차를 얘기하는 것이지,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남자나 여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평등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약속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개인으로서 다루는 정책이지 집단을 대표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집단은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보더라도 올바른 주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앞의 가설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을 아예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것 같다.”

 

핑커는 사실과 의무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자는 어떤 의무감에 좌우되지 않은 채 객관적인 태도로 사실을 연구해야 한다.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의무에 의해서 연구가 편향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올바른 결론을 담고 있는 논문이라 하더라도 과학적으로 잘못되었다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올바른' 태도다.

 

핑커의 말에 따르면, 조엘의 논문에 이의를 제기한 과학자들은 이러한과학적 올바름을 지키기 위해 조엘의 연구가정치적으로 올바른’, 남녀평등의 가치관에 편향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엘의 연구는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있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오류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녀의 분석 방법을 적용했을 때 남녀의 뇌가 두 분류로 구분된다기보다는 서로가 뒤섞여있는 모자이크 패턴에 가깝다는 과학적 발견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면 남녀의 뇌가 확실히 다르다는 주장을 하는 과학자들은 과연 자신의 신념대로과학적 올바름을 준수하고 있는 것일까? 조엘의 논문을 반박했던 과학자들은 대부분 성별 차이에 관한 연구를 주로 수행하던 연구자가 아니기에 일단은 혐의가 짙지 않다. 그러나 호주의 심리학자 코델리아 파인에 따르면, 최소한 핑커가 언급한 사례에서만은 과학자들의과학적 올바름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기만적이라 할 수 있다.

 

3.뉴로섹시즘에 주의하라

 

코델리아 파인은 저서 "젠더, 만들어진 성"을 통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서머스 총장의 발언을 옹호하기 위해 핑커를 비롯한 일련의 과학자들이 인용했던 많은 연구 결과들이 실은과학적으로도 올바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당시에 과학적인 근거로 언급되었던 주요 사례들은 세 가지였다. 남녀의 수학 과학 성적 차이, 태아기 테스토스테론 수준과남성적인 능력의 상관성, 신생아 성별에 따른 행동 차이.

 

파인이 조사한 결과, 남성이 여성보다가변성이 높아 수학 과학 능력이 뛰어난 개인의 비율이 높다는 연구 결과는 특정 국가에 한정했을 때만 성립했다. 만약 능력의 차이가 성별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다면 국가를 가리지 않고 특정 성별에 대한 경향성이 나타나야 하는데, 남녀의 수학 능력 차이에 관한 연구는 국가별로 결과가 다르다. 따라서 이는 타고난 성 차이라기보다 사회 문화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으며, 남성이 여성에 비해 뛰어나다고 쉽사리 결론 내리기 어렵다.

 

태아기 테스토스테론 수준과남성적인 인지 능력과의 상관관계 역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관성 있게 관찰된 바 없다. 태아기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을수록 인지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측정 방법이나 실험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를 얻은 연구도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유명한 사례인 신생아 실험(“Sex differences in human neonatal social perception “)에는 기본적인 설계상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한다(참고로 신생아는 태어난 지 반나절밖에 되지 않아 타고난 성 차이를 확인하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다). 남자 신생아가 여아보다 움직이는 모빌을 선호하고, 여아는 모빌보다 여성의 얼굴을 선호함을 보여준 제니퍼 코넬란(Jennifer Connellan)의 연구 결과는 남녀의 타고난 성향 차이를 드러내는 과학적인 증거로 지금까지도 수없이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파인에 따르면 당시 실험자가 신생아의 성별을 알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성별에 편향된 행동을 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신생아의 주의 집중력은 짧고 불안정하므로 여성의 얼굴과 움직이는 모빌을 동시에 보여주고 아이의 반응을 관찰했어야 하는데 실험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한, 실험 환경에 따라 아이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경 조건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았다. 어떤 아이는 누운 상태로, 어떤 아이는 부모에게 안긴 상태로 실험에 참여했다. 이렇게 잘 통제되지 못한 실험은 때에 따라 편향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파인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추후에 시행된 보다 엄격히 통제된 신생아 실험에서는 성별에 따른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언급한다. 몇 달 후에 다시 실험했을 때에야 비로소 성별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성 고정 관념화된 행동 유형들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아기 초기에 학습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신생아 실험에서 이용된 두 가지 시각 자극. 왼쪽은 논문 1저자 제니퍼 코넬란의 사진. 오른쪽은 그 사진을 뒤섞어 만든 모빌(이라기엔 너무 무섭게 생겼지만 나름 시각 자극 통제를 위한 설계).]

 

파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남녀의 뇌가 다르다는 주장을 대중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과학자들을 하나둘 저격한다.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 여성 심리와 호르몬 클리닉 소장 루안 브리젠딘이 대표적인 타겟 중 하나다. 브리젠딘은 저서 "여자의 뇌, 여자의 발견"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 뛰어나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수많은 신경 과학 학술 논문을 근거로 인용하고 있지만, 파인에 의하면 근거가 빈약하고 오도하는 부분이 있다.

 

여성이 높은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브리젠딘이 인용한 실험 중 몇 가지는 사실 실험 대상자가 모두 여성이었다. 여성이 남성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최소한 비교 대상으로써 남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타인의 마음에 공감하는 거울 뉴런 체계에 관한 연구를 인용하며 여성의 공감 능력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 연구의 피실험자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여성의 뇌가 어른이 되면서 더 높은 공감을 보인다는 말을 하며 인용했던 연구는 사실 여성과 남성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나이에 따른 차이를 본 것뿐이다.

 

이런 브리젠딘조차 자신을 스스로 '마지못해 용감함을 무릅쓰는 진실의 전달자'인 양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내 머릿속에 있는 두 목소리와 고군분투했다. 하나는 과학적 진실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정확성이다. 비록 과학적 진실이 항상 환영을 받는 건 아니지만, 난 정치적 정확성보다는 과학적 진실을 강조하기로 했다."

 

파인에 의하면과학적 올바름정치적 올바름에 무릎 꿇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핑커와 브리젠딘의 사례에 인용된 연구들의 상당수는 모순적이게도과학적으로문제가 있었다. 파인은 이렇듯 학계와 대중 사이에 무비판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남녀의 신경과학적 차이에 대한 관점을 '뉴로섹시즘(Neurosexism)', 즉 뇌성차별주의라며 비난했다.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검증되지도 않았으면서 뇌과학의 권위에 기대어 대중들에게 성차별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남녀 차이에 대한 유명한 뇌과학 연구 중 상당수가 실험 설계 혹은 방법론,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파인은 주장한다.

 

파인에 따르면 뉴로섹시즘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뇌과학꼬리표가 붙은 설명은 과도한 설득력이 있어 대중적 파급력이 크기 때문에. 둘째는 우리가 성별에 따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성 차이를 강화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파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연구 사례를 들어 두 번째 이유에 대해 부연 설명했다. 

 

심리학자 일란 다르님로드와 스티브 헤인에 따르면 유전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뛰어난 수학 능력을 지닌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여성이, 유전적 요인보다는 경험적 요인이 크다는 에세이를 읽은 여성에 비해 수학 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기록했다. 그들은단순히 수학 성적에 나타나는 유전자의 역할을 고려하는 것만으로도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스탠퍼드대 심리학자 캐럴 드웩은 지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발견했다. 드웩에 따르면 능력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노력으로 향상될 수 있다고 학생들을 격려한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성적이 향상되었다.

 

파인은 이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뉴로섹시즘이 남녀 차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강화함으로써 성 차이가 더 명백해지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기에 이 주제를 다루는 과학자들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4.뉴로섹시즘이 어쨌다구?

 

뉴로섹시즘에 대한 파인의 매서운 공세를 보고 있자면 모든 성별 차이에 관한 뇌과학 연구가 사기인 것만 같은 착각까지 든다. 그러나 파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성 차이에 관한 연구 결과를 찾아 부정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녀는 일단 남녀의 뇌 크기가 다르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크기의 차이가 기능의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것은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그녀의 저서에 언급된 남녀의 차이는 크기뿐만이 아니다.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사회뇌과학 연구단장 타니아 싱어의 연구 결과는 남녀의 공감 능력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싱어의 연구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폭넓은 공감 능력을 발휘했고, 활성화된 뇌 부위의 차이도 보였다. 그러나 파인은 이 차이를 평가절하하고 서둘러 본래 주제로 넘어가 버렸다.

 

물론 파인이 시종일관 주장했듯이, 남녀 차이가 명백해 보이는 현상조차 후천적 환경 요인을 배제할 수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갓 태어난 신생아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제외하고는 성별 차이를 확인하려는 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차이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사회 문화적인 영향력에 의한 것 아니냐는 마법의 질문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기발한 실험 설계를 통해 남녀의 선천적인 뇌 차이를 발견하게 되더라도 파인의 논리에 따르면 그것은 구조적인 차이에 불과할 뿐 기능적인 차이로 연결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파인은 프레리 들쥐의 경우 암컷과 수컷이 다른 뇌를 가지고 있음에도 비슷한 자녀 양육 패턴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를 두고 샐리아 무어의 발언을 이용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신경학적 차이를 상쇄하는 다른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신경학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신경학적 차이점은 동일한 행동이라는 종결점으로 가는 다른 경로이다.” 그럴싸한 해석이긴 하지만 이런 논리라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차이가 있으면 환경 탓이거나, 혹은 같은 기능을 위해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외의 해석은 뉴로섹시즘이다. .

 

만약 뇌 부위의 차이도 발견하고 동시에 기능의 차이도 발견했다 치자. 파인은 정확히 그러한 연구 사례를 인용했다. “공간 상관성 과제에 관여하는 뇌의 우측 운동 전 영역을 스캔한 영상은 남성보다 여성의 성적이 낮은 것이 다른 유형의 뇌 반응을 일으킨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공간 추론 능력의 성 차이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파인에 따르면 이는 순환 해석의 오류에 불과하다. 왜 남성이 여성보다 공간 추론 성적이 좋은지를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성별에 따른 특정 뇌 부위의 활성화와 행동의 차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파인에 따르면 이 역시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문화적인 차이일 뿐, 선천적인 성 차이는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이런 식의 뇌과학 실험에서 가장 근본적인 실험 설계상 문제점은 다른 무엇보다도성별 차이를 조사하겠다는 주제 그 자체인 듯하다.

 

파인은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이중적인 잣대를 적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파인은 동물 실험에서 태아기 테스토스테론 수준이 뇌의 성별을 바꾼다는 연구 결과가 있음에도 이를 함부로 인간에게 적용하기는 어렵다며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자신의 논리에 들어맞는 동물 실험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앞서 말한 프레리 들쥐 실험이라든지, 환경 요인에 따라 성 특이적인 뇌 부위가 달라지는 동물 실험과 같은 연구들은 큰 비판 없이 유전적 요소보다 환경 요인이 큰 근거로 인용하고 있다.

 

2013 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대규모 연구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보다 좌뇌와 우뇌의 연결이 더 강했다. 파인은 해당 연구자들이 뇌의 구조적 차이를 기능적 차이로까지 과도하게 해석한 점을 지적했다. 비록 과잉 해석을 경계하는 것은 옳은 태도지만, 그렇다고 뇌의 구조적 차이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파인은 여성과 남성의 뇌 연결 패턴이 다른 이유를 남성의 뇌가 크기 때문에, 혹은 환경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아마 남녀의 뇌가 다른 연결 패턴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평균적으로 남성의 뇌()에 비해 여성의 뇌(아래)의 경우 좌뇌와 우뇌의 연결이 강하다.]

 

최근까지도 남녀 차이에 관한 뇌과학 연구 결과들은 자폐증과 같은 정신 질환에서부터 하품과 같은 사소한 행동에 이르기까지 주제를 가리지 않고 발표되고 있지만, 대부분은 신생아보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이기에 유감스럽게도 파인의 공격을 피해갈 수는 없다. 다만 사회 문화 환경적인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실험 조건에 따라성인 남녀의 뇌 혹은 행동 차이는 존재한다는 과학적 발견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5.그래서 결론은?

 

그래서 누가 맞는 걸까?

남녀의 뇌는 명백히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조엘일까, 충분히 구분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다른 과학자들일까?

남녀의 차이는 명백히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일까, 그런 연구에 대한 해석들이 모두 뉴로섹시즘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파인일까?

 

재미없는 이야기겠지만, 누구 한 사람만이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는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남녀 간의 뇌 차이는 다소 과장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의 뇌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들 역시 모조리 다 무시할 수는 없다. 방법론과 관점에 따라 남녀의 차이는 과장되기도 축소되기도 한다. 연구 결과 및 해석에 대해 과학적으로 일리 있는 지적을 하는 것은 건전하며 의미가 있다. 경계해야 할 것은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를 과도하게 해석해 대중들에게 왜곡된 가치관을 전달하는 것이다.

 

6.우리의 태도

 

파인은 비록 핑커와 같은 과학자들의 태도에 기만적인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으나, “우리가 그 결과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특정한 종류의 연구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즉 과학자들은과학적 올바름에 대한 태도에 동의하고 있다. 자칫 파인은 뇌 구조에 있어 남녀 차이를 찾아서는 안 된다고 눈을 부릅뜨고 외치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녀는남녀 차이에 대한 잠재적인 편견이 연구 디자인과 해석에 영향을 주고 있고, 이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이를 뿐 아니라, 결국 남녀의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하게 되는, 그런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경계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사회 문화적 파장이 크기 때문에 더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인은 이처럼과학적 올바름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과학자들에게 그 이상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과학자에게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흥미로운 방향으로 해석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렇지만 그런 욕구는 종종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한 연구 결과에 자극적인 옷을 입혀 세상에 내놓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비록 살짝 치우친 해석에서 출발했을 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점차 과장되고 오도되어 사회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큰 파문을 일으킨다면 과학자는 그것이 곡해해서 받아들인 대중의 책임일 뿐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을까? 어쩌면 과학자들의 책임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가능성을 인지하는 순간 과학자는 더 깊이 고민하고 책임감 있는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올바름이야말로 과학계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가까운 것이겠지만 그 영역을 훼손하지 않고도 윤리적인 의무를 감당하는 것은 가능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과학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다. 보다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접근하고 과학적으로 해석하되 모든 지나친 확대 해석과 그 사회적 파장에 주의하는 것.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는 수용자로서 우리 역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일부 사례만으로 쉽게 일반화하기 좋아하는 뇌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 지역 출신이 자신에게 안 좋은 행동을 했다면 해당 지역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하기도 하고, 특정 성별을 가진 사람 몇몇이 동일한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성별을 가진 집단 전부를 매도해 버리기도 한다. 이런 일반화는 우리 뇌가 고수하고 있는 일종의 오래된 생존 방식일 수 있다. 우리는 적자생존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빠른 판단을 내려야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마주한 상황에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그 선택이 생존을 좌우하기까지 하는 상황이 즐비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에 있는 상대를 빨리 뻔한 스테레오타입으로 욱여넣어야 했을 것이고, 대부분 그것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유형이었을 것이다. 일단 나에게 위험하거나 좋지 않은 상황을 최대한 회피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을 테니까.

 

그러나 현대 사회는 더 이상 그 정도로 위험한 정글이 아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개개인들의 개성이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를 생동감 넘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뇌는 인지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더 편한 쪽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여 버리고 만다. 상대방을 스테레오타입으로 쉽게 규정하고 멋대로 재단해 버리는 잘못을 습관적으로 저질러 버린다. 누군가 자신을 스테레오타입의 틀에 끼워 넣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면 그제야 그것이 얼마나 부당하고 잘못된 행동일 수 있는지를 잠시 깨닫는다.

 

가능한 한 우리는 평균값으로 측정된 집단 간의 비교 결과를 섣불리 개개인에게 적용해버리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경험적인 사례든 과학적인 결과든 마찬가지다. 앞서 핑커가 언급했듯집단에 따른 차이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 말은 통계 분포상으로 보았을 때의 평균값이나 편차를 얘기하는 것이지,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남자나 여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치적 평등이사람들을 개인으로서 다루는 정책이지 집단을 대표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일련의 뇌과학 연구들과 논쟁, 뉴로섹시즘 논란을 지켜보면서 경험과 과학적 사실에 의존해 특정 성별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으로 개개인을 쉽게 판단해 버리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새삼 상상하고 인식하게 된다.

 



By June

https://www.facebook.com/xbluescreenlifex/

 

 

 

[References]


< 참고 논문 >


화제의 논문

http://www.pnas.org/content/112/50/15468

 

논문에 대한 반박 편지들

http://www.pnas.org/content/early/2016/03/15/1525534113

http://www.pnas.org/content/early/2016/03/07/1524418113

http://www.pnas.org/content/early/2016/03/15/1523888113

http://www.pnas.org/content/early/2016/03/15/1523961113

 

논문 저자의 답장

http://www.pnas.org/content/early/2016/03/15/1600792113.short

http://www.pnas.org/content/early/2016/03/07/1600791113.full

 

신생아 실험 논문 (관련 사진)

http://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163638300000321

 

< 참고 도서 >

 

존 브록만 (2007) "위험한 생각들" 갤리온

코델리아 파인 (2014) "젠더, 만들어진 성" 휴먼사이언스

 

< 관련 기사 >


http://science.sciencemag.org/content/346/6212/915.full (남녀 모자이크 뇌 그림)

http://www.sciencemag.org/news/2015/11/brains-men-and-women-aren-t-really-different-study-finds

https://www.theguardian.com/science/2015/dec/01/brain-sex-many-ways-to-be-male-and-female

http://medicalxpress.com/news/2015-11-male-female-brain-valid-distinction.html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2/01/0200000000AKR20151201108100009.HTML?input=1195m

http://newspeppermint.com/2015/01/15/m-neurosexism/

http://scienceon.hani.co.kr/138928  (남녀 뇌 연결 다름을 보여준 연구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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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June 2016.04.21 03:33 Posted by bslife




Q : Blue Screen Life 패밀리에 합류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BSL 독자 분들을 위해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June : 안녕하세요, Blue Screen Life에서 새로이 함께하게 June입니다. 뇌과학을 공부하고 있고 Noeazy라는 메탈코어(Metal core) 밴드에서 기타를, 49 Morphines라는 스크리모(Screamo)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운동은 싫어하지만 스노우 보드는 좋아합니다. 치열함과 느슨함 사이 어디쯤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대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Q : BSL 합류한 계기는 어떻게 되나요?

어느 늦은 밤, 어김없이 산더미같이 쌓인 일을 내일로 미루고 퇴근하던 중에 레이블 전 사장님이시기도 한 KY O.N. O 님으로부터 Blue Screen Life 에서 함께하자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다면 고민 끝에 아쉬움을 남기며 거절했어야 하는데(?) 그만 감성적으로 덥썩 물어 버리고 말았네요.


Q : 노이지 결성 10주년이 되었는데 본인의 삶에서 하드코어가 의미하는 것과 하드코어 이전과 이후의 삶을 비교한다면 어떻게 얘기할 있을까요?

하드코어는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자 동경하는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하드코어를 접하기 후의 삶이 확실하게 구분된다는 생각은 사실 해본 적이 없어요. 다만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와 현실이 충돌할 하드코어가 힘이 되기도 합니다. 타협하지 않고 크고 작은 신념을 끝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흘리는 사람들이 세상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데까지 가보자 싶은 용기가 생기는 같습니다. 하드코어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기분이 차오르는 물론이고요.


Q : 기타는 어떤 계기로 처음 잡게 되셨나요? 다른 악기도 하시는 지 궁금합니다.

고등학생 서태지의교실이데아 나오는 헤비한 기타 사운드에 매료된 적이 있습니다. 나도 그런 굉장한 소리를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마음에 무턱대고 친구의 기타를 빌려 체육 시간에 몰래 밴드실에 들어가 되도 않는 연주를 해봤지만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아 좌절만 했었죠. 어느덧 대학생이 되어 하드코어/펑크 밴드 동아리 Sturgeon 들어가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기타를 잡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기타 실력과 사운드에 만족하지 못한 채로 이런 저런 고민과 노력을 하던 와중, 새로 장만한 5150 앰프에 기타를 꽂고 팜뮤트(palm mute) 하는 순간 이거다!,싶은 음압이 쏟아져 나와 마침내 모든 번뇌와 욕심이 사라졌던 추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기타 이외의 악기로는 리코더, 멜로디언, 단소를 연주해봤습니다. 농담이고 다른 악기는 관심만 있을 제대로 다루지 못합니다. 어렸을 분명 피아노를 배웠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거짓말 같습니다. 간혹 베이스를 연주하기는 하지만 사실 기타처럼 연주하고 있어서 베이스를 안다고 하기엔 찔리는 구석이..


생각해보니 하나 있네요! 대중적인 악기는 아니지만 트레몰로 주법을 주로 사용하는, 울림이 청아한만도린(mandolin)’이라는 현악기를 재미있게 배우고 연주했던 기억이 납니다. 



Q : 메탈 외에도 다양한 장르를 좋아하시는 같은데, 요즘 어떤 앨범을 제일 많이 들으시나요?

얼마 전까지 김사월의수잔 츠시마미레(Tsushimamire) ‘Sex on the beach’, Chvrches ‘Every open eye’ 앨범을 자주 듣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꽤나 뒷북이지만 위댄스의 매력에 풍덩 빠져 있습니다. 위댄스의 최근 앨범인 ‘Produce Unfixed Vol.3’ 포함해 Vol.1, Vol.2 이렇게 앨범 3개를 주구장창 듣고 있네요. 유튜브에서 ‘130726 위댄스(WEDANCE) Full Concert @제비다방 자주 감상하며 일상의 고단함을 달래고 있습니다.




Q : 음악이 생활에서 얼마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요? 여흥이나 취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음악이 삶의 전부는 아니지만, 여흥이나 취미에 불과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의 감정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반복된 일상, 그것도 혼자서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 많은 일에 매진하다 보면 경험하는 감정도 단조로워지는 때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바깥으로 나가진짜 경험하는 것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 심지어 영화나 독서를 여유조차 없을 즉효약으로 처방할 있는 것이 음악이라고 농담 진담 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제게 감정의 생필품, 혹은 기폭제입니다.


Q : 본인이 생각하는 하드코어 라이프스타일은 어떤 느낌인가요?

스스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고 실현하기 위해 단단한 마음으로 삶을 온전히 통과해 나가는 태도라는 느낌이 듭니다.


Q : 뇌의 관련된 연구를 하신다고 들었는데, 연구분야에 대한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공감(Empathy)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대가 고통받을 자신도 함께 아파할 있는 공감 능력이 어떤 부위의 어떠한 회로에 의해 발현되는지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고난 유전자 이외에, 후천적인 환경이나 사회적인 기억이 어떠한 방식으로 공감 능력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도 함께 연구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여기서 주제를 확장해, 우리가 다른 성별, 인종, 집단에게 보이는 공감 수준이 다른지, 그리고 그러한 차이를 줄이기 위해 어떠한 방법이 필요할 있을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여기에 더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남을 돕는 행동과 남을 희생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행동이 뇌과학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조절할 있을지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입니다.


Q : 뇌과학에 흥미를 갖고 빠지게 계기가 있을까요?

사람의 마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다양한 마음, 감정이 어떠한 기본 단위로 분해되고 재조합될 있는지를 구체적인 형태로 파악하고 싶었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포함한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있는 하나의 과학적 세계관을 정립해보고 싶었습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작업을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들이 수행했지만, 이제는 뇌과학이 정답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렇게 뇌과학의 구렁텅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가치관이 약간 달라져서 여전히 마음에 관심이 많지만, 문학과 같은 다른 수단을 통해 접근하는 것에도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Q : 생명체를 가지고 하는 연구는 굉장히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들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어떤 비전을 가지고 연구에 임하고 있나요?

생명체를 다루는 연구는 여러 가지 의미로 굉장히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여전히 고민이 많지만, 쉽지 않고 흔치 않은 경험을 통해 세상에 도움이 되는 통찰을 얻을 수 있는 드문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일단은 버텨 나가고 있습니다.


Q : 본인의 연구 분야는 아무래도 윤리적인 문제가 많이 따르지 않나요? 현직에 있는 분들은 이런 이슈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윤리적인 문제는 연구를 시작한 처음부터 지금 까지도 순간 잊을 없는 하나입니다. 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을 해오고 있는데, 언젠가 주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풀어내 보고 다양한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 받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윤리적 이슈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연구자들도 일반인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 아무렇지도 않게 실험을 수행하거나 몸과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연구자는 없습니다.


Q : 혹시 음악과 현재 연구하시는 분야와 연관성을 가지고 접근해본적은 있는지요(ex 음악이 뇌에 미치는 영향 )

음악과 뇌과학은 종종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주제 하나입니다. 크게 2가지 주제가 있었는데 하나는 음악의 정서적 혹은 치료 효과, 다른 하나는 환자의 뇌파를 음악으로 변환하는 것이 생각나네요. 전자는 음악 심리 치료를 포함해 음악이 어떻게 우리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메커니즘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그것을 밝혀 보자는 것이었는데 결국 다들 바빠서 잡담으로 끝나 버렸고, 후자는 말이 쉽지 뇌파의 어떠한 특성을 음악으로 어떻게 매칭시킬 것인지가 거의 예술의 경지에 가까울 정도로 주관적이고 복잡했기에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뇌파를 음악으로 바꿔서, 음악만 듣고 특정한 질병을 진단하는 목적이었으니.. (이게 엉뚱하기만 한것은 아닌 , ‘생각의 탄생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소리 형태로 변환된 데이터가 때로는 직관적인 판단에 도움을 주기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실험으로 얻었던 뇌세포 신호의 복잡성이 기타 리프의 리듬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에, 뇌신호를 악보로 변환해 젠트(Djent) 리듬 비스무리한 것을 만들어 적은 있습니다. Noeazy EP ‘Bioshock’ 앨범에 결과물이 랜덤으로 들어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앨범을 구매하시면 되겠습니다.


Q : 석사 이후의 진로를 어떻게 계획하고 계신지요?

우선 특별한 일이 없다면 지금 이대로 박사 과정을 마치게 될 예정입니다. 그 뒤에는 구글(google)이나 바이두(Baidu)와 같은 기업 혹은 알렌 재단의 인공지능 연구소(Allen Institute for Artificial Intelligence), 레드우드 신경과학 연구소(Redwood Neuroscience Institute) 같은 곳에 가서 뇌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인공 지능에 대한 연구에 도전해 보는 것이 큰 목표지만 그러기 위해선 각오해야 할 것이 많을 것 같네요. 혹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정서, 공감 및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연구 주제를 다른 방향으로 깊게 파고 들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국내에 하나 둘 생기고 있는 뇌과학 벤쳐 기업들에도 관심이 있고요. 기회가 된다면 전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 엉뚱한 생각도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Q : 평소 일상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씻고 뛰어 나가서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합니다. 다양한 실험과 업무와 잡무를 하다 보면 일은 아직 산더미같은데 어느새 저녁이 됩니다. 보통 밥을 먹고 바로 다시 들어와 일을 하거나 공부를 했는데, 최근에는 건강을 위해 밀린 일을 되도록 멀리하고 헬스나 요가를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틈틈이 책이나 글을 읽고 정리하기도 합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바로 씻고 자거나 누워서 책을 조금 읽다가 잡니다. 


Q : 현재 분야 탐독하거나 관심있게 보는 분야가 있다면? (ex-video game, sports, etc)

분야를 지목하기는 어렵고, 특정 현상이나 개념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주로 다양한 가치들이 충돌하는, 다들 확실한 답을 내고 싶어하지만 답이 없어 보이는 이슈에 주목하고 있는데, 최근 가장 머릿속 깊이 박혀 있는 것은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둘러싼 충돌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트롤리학(trolleyology) 공리주의와 같은 윤리적 딜레마에도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의 평범성, 악을 이해하는 ,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같은 이슈에도 매우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들여다 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중입니다. 정보와 물질이 넘쳐나는 지금 시대에 적합한 유저 인터페이스(User interface) , 교육, 큐레이션(Curation) 무엇일 지에도 흥미가 있어 종종 트렌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Q : 굉장히 다독하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저 개인적으로도 BSL 멤버로서도 (KY.O.N.O)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데, BSL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 아이디어, 인사이트들이 있다면 어떤 것이 될까요?

다독이라기 보다는 매우 개인적인 취향의 잡독을 하고 있습니다. 윤리적인 고민이 담겨 있거나 나른함 혹은 치열함이 느껴지는 소설을 가장 즐겨 읽고, 삶의 태도가 단단한 에세이를 좋아합니다. 딜레마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소재를 독특한 시선으로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비문학도 좋아합니다. 아직은 독서량이 부족하지만, 언젠가 흥미로웠던 작품들 중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들을 한데 모아 하나의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그들에서 인용된우리가 가난하므로 사악해질까라는 문구가 최근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데, 이런 책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거나 사회 현상과 연결 지어 리뷰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같습니다.


전공과 관심사를 동시에 살려 마음, 예술, 윤리, 인공지능과 같은 분야를 뇌과학에 접목시켜 소개해 보고도 싶습니다. 고려하고 있는 주제 대표적인 것은공감입니다. 지금 시대에 필요한 능력이 타인에 대한공감 있다는 내용을, 문학을 포함한 예술, 뇌과학과 심리학을 통해 풀어나가 보고 싶어 자료를 모으는 중입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고 모든 것을 실현할 있을 것만 같아 보이는 현대 사회가 오히려 개개인의 고립과 자기 착취를 초래한다는단속사회’, ‘피로사회 포함해혐오 사회 같은 무거운 담론도 가능하다면 감당이 만큼만 살짝 다뤄 보고픈 욕심도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만인의 고질병, 결정 장애와 미루기(Procrastination) 대해서도 어떠한 형태로든 이야기해보고 싶고요.


Q : 본인과 같이 밴드/연구에 동시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후에 일어날 (?)들에 대해 조언을 한다면?

영화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프랭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 필요한 , 필요하지 않은 것을 파악한다. 그것이 재고 관리의 기본이다.” 저는 원칙이 재고 관리뿐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것과 관심사가 많은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지만 자칫하면 하나에 집중했어야 에너지를 지나치게 분산하는 바람에 모든 면에서 골고루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게 수도 있으니까요. 저도 그런 사람 일인으로서 여전히 좌충우돌하고 있지만, 좋아하는 것을 명확히 하고 감당할 있는 범위를 확실히 파악한다면 정반대 성향으로까지 보이는 마리의 토끼를 잡을 확률을 높일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부한 얘기겠지만 요즘 들어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체력 관리의 중요성도 빼놓을 없겠네요.



June씨가 자주가는 사이트 5군데가 있다면

www.naver.com 

www.google.com (gmail, calander, scholar)

www.youtube.com 

storyfunding.daum.net (다음 스토리펀딩)

www.brain-map.org (Allen brain atlas)



좋아하는 TV Show 5  

TV 보지 않아 마땅히 꼽을만한 것이 없네요그나마 TV show 가장 가까운 걸로는TED (www.ted.com웹드라마대세는 백합 애청했습니다.

직업 특성상(?) TV 대신 팟캐스트를 즐겨 듣는데, 남은 리스트는 맘대로 좋아하는 팟캐스트로 대신하겠습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 

김영하의 읽는 시간

라디오 책다방



Fav 아이돌은 누구

.. 살짝 고민 되지만f(x)



본인 삶의 베스트 맛집 3군데

결정 장애와 디지털 치매가 있는 제게는 어려운 질문이네요.

합정 빅플레이트. 여기만큼 알리오 올리오가 맛있는 집을 찾고 있습니다(없어지고 다른 음식점이 생겨서 충격).

홍대 부탄츄. 지금까지 먹어본 일본 라멘 제일 맛있음.

대전 전민동 함바그또카레. 살짝 매콤한 일본식 카레와 두툼하고 부드러운 함박스테이크의 찰떡궁합.



인생 음반 5장은 ?

고작 5장이라니 그런 시련을


Lily Chou-Chou OST, ‘呼吸(호흡)’

東京事變(Tokyo jihen),敎育(교육)’

Finch, ‘What it is to burn’

Queen adreena, ‘Drink me’

49 Morphines, ‘Partial eclipse’



가장 자주 사용하는 어플리케이션 5

메모

포켓(Pocket)

에버노트(Evernote)

사파리(Safari)

팟캐스트(Podcast)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인용구및 삶의 모토가 있다면

필립 로스의 소설에브리맨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좋아합니다.


분명한 어쨌든 사람들을 옳게 이해하는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을 잘못 아는 삶이다. 잘못 알고, 잘못 알고, 잘못 알고. 그리고는 주의를 기울여 다시 생각하고는 잘못 안다. 그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방법이다. 우리는 틀렸다.”


삶의 모토는 ‘Non serviam’.


좋아하는 작가인 김사과 님이 손목에 새겨 넣은 라틴어 문구입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찾아보니 본디 루시퍼가 했던 말로 종교적인 불복종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네요. 

 

곧이곧대로 풀이하면,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섬기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예술가의 태도로 한정 짓기도 하지만, 인간의 굴하지 않는 의지, 올바르지 못한 것에 복종과 타협을 거부하는 태도로까지 해석할 있습니다. 하드코어 라이프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고, 많은 것들이 쉽게 부서지고 꺾이는 요즘 같은 시대에 어울리는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http://www.facebook.com/xbluescreenlif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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