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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1.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모비딕>으로 잘 알려져 있는 19세기 소설가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Street)>


바틀비와의 첫 만남은 짧은 인터넷 기사에서였다. 스크롤을 내리다 '바틀비적' 이라는 낯선 표현이 눈에 밟혔다. 알고보니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인물에서 따온 말이었다. 정확한 맥락은 알 수 없었지만 바틀비가 소설 내내 반복하고 있다는 단 하나의 문장이 머릿 속에 들어와 콕 박혔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이런 느낌?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니,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얼 안 했으면 좋겠다는 걸까. 나 역시 하고 싶은 것 이상으로 안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막연히 공감했고, 동시에 관심이 생겼다. 바틀비의 자세한 사정이 궁금해 졌다. 그의 사연을 이해하게 되면 나도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 바틀비처럼 당당하게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면서 바틀비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뉴욕 월스트리트에 사무실을 차린, '가장 손쉬운 삶의 방식이 최고'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변호사는 새로운 필경사로 바틀비를 고용한다. 당시에는 복사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사본이 필요한 서류를 직접 손으로 옮겨 적는 '필경'이라는 일을 대신 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틀비의 첫 인상은 근면 성실한 청년이었다. 조용한 몸가짐에 굶주린 것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문서 작업을 기계적으로 척척 처리해 내는 바틀비가, 고용주 변호사는 마음에 쏙 들었을 정도였으니까.

바틀비는 이내 짐작했던 대로 훌륭한 '프로거부러'의 태도를 보여 준다. 어찌 저리 차분하면서도 완고히 거부 의사를 관철할 수 있는 건지 그 멘탈이 존경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다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정도가 너무 심했다. 바틀비는 '해야 하는 것'을 하나 둘 거부하기 시작한 끝에 결국 감옥에 끌려가게 되고, 심지어는 식사마저 거부하다 죽고 만다.


나씨나길의 끝판왕 바틀비


둘째, 실은 이게 더 당황스러운 부분이었는데, 바틀비의 거부에는 논리적인 이유가 없었다. 바틀비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왜 거부를 하는지 그 당위에 대해 제대로 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바틀비의 모습에는 얼핏 '갑'의 지시에 거부로 일관하는 '을'의 태도가 엿보인다. 그렇기에 평소 '갑'에게 당당하지 못한 우리들에게 잠시나마 사이다 같이 상쾌하고 통쾌한 기분을 선사해 준다. 그렇지만 이성적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남았다. 그래서, 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건데? 

변호사의 사무실에 취직해 열심히 일하던 바틀비는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성실하던 사람이 갑자기 일을 안 하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보통 특별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상사의 불합리한 태도라든지 업무의 부조리 같은 것들. 그러나 그런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강제로 야근을 시키는 일도 없었고, 상사의 고압적인 태도도, 기타 복잡 미묘한 정서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예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바틀비의 거부가 지나치게 뜬금 없는 나머지 고용주인 변호사의 답답한 심정에 더 공감이 갈 지경이었다. 거부의 징후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주어진 업무를 하루하루 열심히 수행하던 바틀비는 어느날 느닷없이 돌변해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안 했으면 좋겠다니?"

나는 그의 말을 되뇌며 몹시 흥분한 상태로 일어섰다. 그리고는 한걸음에 사무실을 가로질러 그에게 갔다.

"자네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제정신인가? 이 서류를 비교하는 일을 도와달란 말이네. 자, 받게!"

나는 그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중략)

"...요컨대, 하루 이틀간 조금만 합리적인 인간이 되겠다고 지금 말해달라는 걸세. 그렇게 좀 대답해 주게. 바틀비."

"현재로썬, 조금 더 합리적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대답은 온화하면서도 시체처럼 창백했다.





당황한 변호사가 바틀비에게 거절하는 이유에 대해 적접적으로 물었을 때도 그는 한결 같았다. 

"왜 거절을 하는 겐가?"

"안 하는 게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느낌적인 느낌


왜 안하고 싶냐 물었더니 안 하는게 좋기 때문이라는 대답이라니, 세상에. 일반적인 사회 생활에서는 절대 상상도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이런 바틀비를 흉내내거나 따라하다가는 대번에 쌍욕을 한 사발 얻어 먹거나 정신 이상자 취급을 받고 쫓겨날 것 같았다. 바틀비 운운하며 시키는 일을 하지 않겠다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도 납득시킬 수없는, 단지 이유없는 반항에 가까운 제스쳐에 불과한 듯 했다.


2.
'하지 않는 것'의 정치성 

바틀비의 난데없고 당황스러우며 고집스러운 거부가 끝내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질 무렵, 소설의 마지막 한 페이지 만큼은 그의 기이한 행동에 대한 변명 혹은 해명에 할애된다.

바틀비가 감옥에서 죽고난 후, 변호사는 바틀비가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수취인불명 우편 처리소' 말단 점원이었다. 이미 죽거나 사라져 버린 사람들을 향해 쓰여진 편지, 보내진 반지 따위의 물품들을 분류하고 소각장으로 보내는 작업을 매일같이 반복했을 바틀비. 희소식이 됐을 수도 있는 편지를 간절히 기다리다 결국 받지 못한 채 절망 속에서 죽어갔을, 수취인의 사연의 무게가 바틀비를 짓눌렀으리라 화자는 짐작한다. 바틀비와 인간을 향한 안타까움이 섞인 탄식과 함께 막을 내리는 이야기. 

여전히 구체적이고 그럴싸한 이유는 보이지 않지만, 바틀비를 단순히 정신이상자로 치부하거나 시덥잖은 '병맛' 캐릭터에 불과하다고 단정 짓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다.

덕분에 바틀비의 기묘한 태도, 조용하지만 올곧은 '하지 않음'은 질 들뢰즈,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쟁쟁한 철학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들에 의하면 바틀비의 태도에는 정치적이며 윤리적인 지점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일종의 마하트마 간디식 비폭력 운동 정신을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런거 말고


바틀비는 특별한 사명감이나 목적 의식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적극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부조리에 저항 한 것도 아니다. 바틀비는 다만 상급자가 시키는 일을 수동적으로, 조건 반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거부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단호하게 거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른바 소극적인 저항을 주체적으로 할 줄 아는 능동적인 인물이었고, 그것이 바틀비라는 캐릭터의 남다른 점이었다.

사실 바틀비의 행동은 표면적으로 보면 지나치게 예민한 소시민의 난데없기 그지 없는 생때 혹은 '을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 전반에 걸친 과장된 행동- 막무가내식 거부 - 과 얼핏 드러나는 바틀비의 과거 사연은 이 이야기를 일종의 상징 혹은 우화로 읽힐 수 있게끔 만들어 준다.

이를테면 바틀비의 거부는 월스트리트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중심지에서 자본가들의 편익을 도와준다 여겨지는 변호사의 '화이트 칼라'식 업무에 대한 거부를 상징할 수 있다. 책상 앞에 앉아 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 만으로도 수백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이익으로 치환할 수 있게 된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갑'은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얼마든지 잔인한 짓을 저지를 수 있고 심지어 그러한 행위조차 잘게 쪼개진 채 '을'들에게 분배되기 일쑤다. '을'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거시적으로 어떤 부조리와 부정적인 파급 효과를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보통 생각하지 않고, 그럴 여유조차 없다. 그렇게 희미하게 희석된 단순 업무를 밥벌이를, 생존을 위해 별 생각없이 받아 들이고 수동적으로 처리한다.

바틀비는 이러한 기성 프레임에서 벗어나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오'를 외치는 모난 돌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런 바틀비가 맞이한 비극은 예외적인 결말이라기 보다는, 안타깝지만 참으로 현실적이고 상식적일 뿐이다. 바틀비 같은 사람은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정상적으로 살아 남을 수가 없다. 즉 <필경사 바틀비>는 현실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있는, '소극적인 저항'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인물을 등장시키고자 만들어진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소극적인 저항'을 담은 일종의 우화라고 볼 때, 그토록 궁금했던 바틀비의 당위 혹은 거부하는 이유는 비로소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린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이유에 대해 아무도 중요하게 캐묻지 않듯이.

이러한 문학적 상징이 유별나고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는 <필경사 바틀비>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21세기 한국 작가 한강의 소설집 <채식주의자> 에서도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는 '바틀비 정신'의 보편성을 읽을 수 있다.



최근 맨부커 인터네셔널 상을 수상하여 화제가 된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작스레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해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중략)

"한번만 먹기 시작하면 다시 먹을 거다. 세상천지에, 요즘 고기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불만스러운 얼굴로 처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나, 웬만하면 먹어. 예, 하고 먹는 시늉만 하면 간단하잖아.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장인이 고함쳤다.

"무슨 얘길 하고 있어. 어서 팔 잡아라. 정서방도."
"아버지, 왜 이러세요."

(중략)

"누나, 그냥 좋게 먹어. 누나가 받아서 먹어."

영혜의 행동은 얼핏 바틀비의 그 것을 닮았다. 바틀비와 영혜는 고기를 먹는 일, 상사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과 같은, 남들은 다 당연스레 받아들이는 일들을 스스로의 의지로 거부함으로써 사회의 통념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자칫 어르신이 정성스레 차린 음식을 먹지 않고 반찬 투정이나 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영혜의 거부는 다수의 일반 사람들에게는 '고문관'의 '진상짓'일 뿐이다. 다수의 상식에 의해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따라서 교화되어야 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영혜는 결국 자신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는 가족들 덕분에 자해 소동을 벌이게 되고, 그 결과 정신 병원에 가게 된다. 이런 그녀가 육식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답하는 방식 역시 낯익은 구석이 있다.


"왜 고기를 먹지 않는 거지? 언제나 궁금했는데, 묻지 못했어."

(중략)

"꿈을 꿔서...... 그래서 고기를 먹지 않아요."
"무슨...... 꿈을 꾼다는 거야?"
"얼굴."
"얼굴?"

영문을 알 수 없어하는 그를 향해 그녀는 낮게 웃었다. 어쩐지 음울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이해하지 못하실 거라고 했잖아요."

영혜는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는 말에 엉뚱하게도 꿈을 꿔서 그렇다고 답한다. 왜 시키는 일을 하지 않냐는 질문에 안 하는게 좋기 때문이라고 생뚱맞게 대답한 바틀비와 닮은 꼴이다. 둘 다 유난을 떠는 사회부적응자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거기서 모든 이야기가 끝나 버린다. 그들은 이상한 사람들이었을 뿐이고, 이상한 행동으로 우리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므로 교정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들의 몸짓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그 곳에서 소극적인 저항을 읽어내는 순간 비로소 풍부한 사유가 시작될 수 있다. 소설가 김중혁은 이런 순간을 다음과 같이 포착한 바 있다.

"바틀비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는 말을 계속 보고 있으면 짜증이 나고 화가나고 우습기까지 하지만, 결국엔 그가 왜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어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타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반드시 상징을 구체적으로 따지고 드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필경사 바틀비>의 작가 허먼 멜빌은 월스트리트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를 상징하고자 바틀비라는 인물을 창조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에서 육식이 내포하고 있는 다른 생명체에 대한 폭력성에 주목하여 그러한 폭력에 대한 거부를 이야기하고자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라는 인물을 등장시켰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꼭 집어서 해석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닐 수 있다. 명확한 이유가 부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빈 자리에 채워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이 자유롭게 오고 갈 수가 있다. 물음표를 남기는 이런 이야기들을 구심점 삼아, 저항하고 거부할 필요가 있음에도 평소에는 의식적으로 구체화하지 못했던 여러 대상들에 대한 각자의 목소리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된다. 


3.
'열심히의 세계'에 대한 거부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정치적인 해석 이외에도, 바틀비는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또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제목부터 돌직구인 <안 해>라는 소설을 함께 읽으면 이 점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짧은 소설에는 '히키코모리 바틀비'라 불리기도 하는 흥미로운 주인공이 등장한다. 


박솔뫼 작가의 단편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에 수록된 <안 해>



주인공은 친구와 함께 노래방에 갔다가 감금 당한다. 친구의 생사 여부도 모른 채, 주인공은 노래방 주인에게 붙잡혀 그가 시키는 일을 하게 된다. 일부 줄거리만 보면 마치 범죄 스릴러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노래방 주인과 주인공이 보이는 태도가 사뭇 엉뚱하다. 노래방 주인은 주인공을 가둬 놓지만 딱히 돈을 요구하거나 알기 쉬운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다만 계속해서 이상한 설교를 하며 노래를 '열심히' 부르게 할 뿐이다. 피해자인 주인공은 이런 기묘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내내 졸리워 하면서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감금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기 보다는, '열심히' 하지 않으려고 할 뿐이다. 둘 다 평범한 범죄자와 피해자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나사가 빠져 있다. 그런 와중에 뜬금 없이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이 노래방 주인의 입에서 튀어 나온다.

너희는 도무지 열심히라는 것을 모르니까 삼십분간 내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에 대해 생각해. 열심히.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열심히.

(중략)

너는 새로운 자신으로 나아가야 해. 열심히의 세계로. 아름다움과 정신과 정열의 세계로 새로운 세계로 가야 해. 이러면 안 돼. 테이블이 부서질 때까지 자신을 부수고 테이블이 부서짐과 동시에 자신도 부수고 태어나야 해 새롭게.


노래방 주인이 주인공에게 하는 말은 납치범이 인질에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꼰대'가 '요즘 젊은 것들'을 향해 하는 설교에 가깝다. 구체적인 내용은 없지만, 그저 열심히 해야한다고 한다. 열심히 하지 않으려는 '너희'에게 '열심히'를 주구장창 강요한다.


새마을 운동 같은건가



그런 노래방 주인의 설교에 대해,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반발한다.

하지만 잘못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있다면 아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하지 않지? 하는 비뚤어진 교정 의식과 아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안 되지? 하는 피곤한 자학 이 둘뿐이었다. 

(중략)

무언가를 잘하게 되는 데 필요한 건 열심히가 아니라고 그게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로 보여도 당사자에겐 아니라니까 열심히가 아냐 무작정이 아니란 말이야 좀 더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 있는 항목이 당사자와 함께 달려 나가는 거에 가깝다니까. 뭐 양보해서 열심히가 중요하다고 쳐도 정말로 열심히의 세계가 있겠어? 있다 해도 그게 튼튼해?

마침내 노래방 주인이 방심한 틈을 타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은 노래방 주인을 묶은 뒤 마이크로 그의 머리를 몇대 툭툭 치며 이렇게 말한다. 

저는 열심히 하지 않고 할 생각도 없고 왜냐면 열심히의 세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도무지 열심히라는 것을 모르니까" 라며 '열심히의 세계'를 강요하는 노래방 주인에게 "저는 열심히 하지 않고 할 생각도 없고 왜냐면 열심히의 세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주인공. 임금을 지불하는 댓가로 당연히 해야하는 일을 지시하는 고용주에게 "하지 않는 것을 택하겠다"고 선언해 버리는 바틀비. 일에 굶주린 것처럼 지나치게 열심히 일을 하던 바틀비가 갑작스레 열심히 하지 않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도 있다. 긍정의 과잉이 낳은 반작용이다.

이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지적한 바 있는 '열심히'의 과잉이 초래한 이 시대의 질병, 지나친 피로와 무기력에 가깝다. 노래방 주인의 지독한 설교에서 마침내 빠져나와 자유의 몸이 된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는 다음과 같은 대사는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열심히 안 해 아무것도. 지금까지 열심히 한 적도 없지만 앞으로도 안 한다. 안 해 절대 안 해.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 '병원', 윤동주



'열심히' 하라는 강요는 결국,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안 하겠다는 정 반대의 다짐을 낳게 되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열성적으로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무한한 가능성과 자기 계발 만능의 사회를 온 몸으로 통과해 지나가면서, 오히려 무한히 펼쳐져 있는 선택지에 길을 잃은 채 압도되고 질식해 가는 모습이 만연한 사회.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열심히' 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보다 더 열심히 해야할 것만 같은 불안과 초조에 휩싸여 스스로를 끝임없이 채찍질 하고 그 결과로 보다 더 지치고 무기력해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렇게 소진되어 버린 책임은 제대로 '더 열심히' 하지 않은 개인에게 전가되는 것으로 악순환의 연결 고리가 완성된다. 


열심히 업무에 매진하던 바틀비가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다며 조용한 거부를 하는 것, '안 해'의 주인공이 노래방 주인의 열심히 하라는 설교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모두, 이런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지만 단단한 몸부림이다. 밑도 끝도 없는 근면 성실함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사회에서, 최소한의 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용기있는 목소리이자 최소한의 희망을 담은 몸짓이다. 


4.
다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과거에 비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때로는 과잉이기까지 한 지금 이 시대에, 개인적인 성취를 이뤄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변명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는 듯 보인다. 열심히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이유는 충분히 제대로 열심히 하지 않은 스스로가 문제라고 성공한 사람들은 말한다. 더 열심히 스펙을 쌓고 자기 계발을 하고 멘토와 힐링을 찾아 더 높이 성장하라며, 다양한 방식으로 개인을 다그치고 '성공'으로 몰아 붙이는 분위기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이러한 긍정의 과잉은 결국 반대 급부로 작용하여, 그 어느 시대보다도 급격히 증가한 다수의 무기력해진 개인들을 양산하고야 말았다. 

이 세상은 기회로 가득 차 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그 기회를 잡는다.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해서, 더 풍족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공부를, 일을, 자기 계발을, 노력 따위를 열심히 해야 한다. 이렇듯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소리 높여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너무 큰 나머지, 정작 '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은 줄곧 외면 받아 왔다. 이런 상황에서 가진 것이 없기에 더 열심히 일 해야할 것만 같아 불안한 우리들은 끝임없이 '노오력'을 해 보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비뚤어진 교정 의식'과  '피곤한 자학'이기 일쑤다.  

구글링을 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이미지들. 대한민국에서는 현재 자조적이고 해학적인 '노오력' '짤방'이 대유행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과잉 착취하지 않기 위한 거부. 불의에 대한 거부. 우리에게는 종종 이러한 '하지 않음'이 필요하다. 소극적인 저항이, 자기 스스로를 돌보는 행동이 필요하다. '열심히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영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다.  우리는 법적으로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반강제로 야근을 하고 불합리한 업무를 하고 주말 출근을 하는 것을 받아 들인다.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행위를 거부할 용기가 필요할 때조차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하던 대로, 시키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행동해 버리곤 한다. 우리는 딱히 불의로 가득 찬 사람은 아니지만, 습관대로 행동한 결과 작고 사소한 악을 낳고 방치하게 된다. 그렇게 수십억 인구가 낳은 아주 작은 악들은 서로 뭉치고 무럭무럭 자라나 우리를 옭아매는 채찍이 되어 되돌아 온다.
 
물론 바틀비의 워너비가 되어 거부하고 싶은 모든 것을 내키는 대로 그만둘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상적인 이야기인 것이 사실이다. 우리에겐 사회적 동물로서 주어진 최소한의 책임이 있고, 심지어 '금수저'라 해도 종류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떠한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는 예외가 없다. 또한 현실은 단순한 이분법으로 칼 같이 자르기 어려운, 복잡하게 엉킨 서로의 이해 관계와 사연들로 가득 차 있기에 쉽사리 온 몸을 던져 거부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우리가 무언가를 쉽게 거부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별가라면 가능하다


멈추지 않고 '열심히' 하는 행동 역시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깊이 있는 방향의, 적당한 '열심히'는 우리 모두에게 이롭다. 그러니까 여기서 핵심은, '적당한', 이다. 우리에게는 이 적당한 수준을 알기 위한 감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그저 받아들이고 거부할 줄 모르는 삶의 태도를 습관처럼 유지하고 있노라면, 그나마도 거의 퇴화되어 있는 그런 감각은 한층 더 둔해져 버리고 만다.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왜 열심히 해야 하는지, 무엇을 어떤 이유로 거부해야 하는지, 자신있게 판단하기 위한 '거부의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과 타인에 대해 보다 주의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또는 행동하지 않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백년도 더 된 가상의 인물 바틀비가 21세기 '열심히의 세계'에 사는 우리에게 남긴 하나의 문장. 그 짧은 문장에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잃어서는 안되는 것을 새삼 선명하게 마주할 수 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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